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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두뇌'를 팔고, 밤엔 '性'을 팔고...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추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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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두뇌'를 팔고, 밤엔 '性'을 팔고...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추적기

입력
2019.01.11 04:40
수정
2019.01.11 09:43
23면
0 0

논픽션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와타나베 야스코의 시체가 발견된 일본 도쿄 시부야 마루야마초의 목조 아파트. 야스코의 생이 끝나고, 살해 용의자인 고빈다의 비극이 시작된 곳이다.위키피디아∙글항아리제공
와타나베 야스코의 시체가 발견된 일본 도쿄 시부야 마루야마초의 목조 아파트. 야스코의 생이 끝나고, 살해 용의자인 고빈다의 비극이 시작된 곳이다.위키피디아∙글항아리제공

1997년 3월 19일 일본 도쿄 시부야의 낡은 아파트에서 30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됐다. 교살된 희생자는 39세 여성 와타나베 야스코. 명문 게이오대 경제학부 출신으로, 일본 최대 전기∙가스 회사인 도쿄전력의 잘 나가는 간부였다. 이것만으로 특급 사건이었다.

야스코의 이중생활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초특급으로 커졌다. 야스코는 밤마다 ‘거리의 여자’로 변신했다. 낮에는 도쿄전력에서 ‘두뇌’를 팔고, 밤에는 시부야 러브호텔촌에서 ‘성’을 팔았다. 1989년부터였으니, 거의 10년째였다.

사건은 ‘상투적’ 결말로 달려갔다. 30세의 네팔인 노동자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그는 후진국 출신이었고, 불법 체류 중이었고, 가난했다. 그의 신분이 곧 사건의 단서이자 증거였다. 검찰이 고빈다를 기소해 재판이 시작됐다.

섹스, 엘리트 여성, 이주 노동자, 살인까지, 자극적 요소를 때려 넣은 듯한 사건을 놓고 일본은 ‘발정’ 난 것처럼 흥분했다. ‘논픽션 거장’이라 불리는 일본 작가 사노 신이치도 사건에 매혹됐다. ‘도쿄전력 OL 살인사건’은 그의 열정적 취재 기록이다. 일본 출간은 2000년이었다. 19년 전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한 건, 세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아서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 가면서 혐오, 차별, 낙인의 유혹을 경계하자고 되새기게 된다. 속단하지 않는 저자의 글 쓰기는 가짜 뉴스의 시대에 중심 잡는 법을 일러 준다.

야스코는 살인 사건 피해자다. 성매매 전력이 알려진 뒤, 일본 사회는 그 사실을 잊고 망자의 존엄을 찢어발겼다. 야스코가 하룻밤에 4명을 받을 때까지 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호객 했다는 것, 3,000엔(약 3만원)에도 기꺼이 성을 팔았다는 것, 섹스 전엔 꼭 맥주 세 캔을 마시고 편의점 어묵을 먹었다는 것, 하루도 빠짐없이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는 것 같은 기행들이 무차별 보도됐다. 한 주간지는 야스코가 생전에 찍은 나체 사진을 실었다. ‘충분히 정숙하지 않은’ 여성은 늘 그런 취급을 받았다. 2007년 신정아씨도 같은 모욕을 당했던가.

모두가 야스코의 사생활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저자는 고빈다에게 눈을 돌렸다. 정황 증거만으로 고빈다를 기소한 검찰의 논리를 하나씩 허물어 갔다. 취재를 계속할수록 고빈다가 무죄임이 확실해졌지만,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고빈다가 그랬을 리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성선설 위에 세워진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이 인간을 흑백논리로만 판단하려는 검찰 측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사노 신이치 지음∙류순미 옮김

글항아리 발행∙496쪽∙1만9,000원

고빈다는 2000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책은 1심에서 끝난다. 2003년 2심에선 유죄로 뒤집어져 무기징역을 받았다. 결국 저자가 옳았다. 2012년 3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일본 정부가 고빈다에게 약 7억원의 보상금을 줬지만, 15년을 ‘살인범’으로 산 뒤였다. 2019년 현재 진범은 잡히지 않았다.

야스코의 인생 역시 미스터리로 남았다. 요즘 말로 하면 ‘알파걸’인 그가 왜 성을 팔았는지, 그것도 왜 그렇게 “성실하게” 팔았는지를 저자는 미완성 퍼즐로 남겨 뒀다. “논픽션의 요점은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적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반 토막짜리 논픽션이다. 조각 난 사실을 퍼즐처럼 하나하나 끼워 넣고 빈 공간은 그대로 비워두는 것이 논픽션라이터의 자존감이 아니었던가.”

저자가 스스로 대단한 일을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감추지 못하는 게 책의 작은 흠이다. 책은 진실을 향해 직진하지 않고, 저자의 사설, 사변으로 ‘자주’ 빠진다. 문학적 글 쓰기를 시도한 대목도 썩 자연스럽지는 않다. 책 제목의 ‘OL’은 일본 발음으로 오에루, ‘오피스 레이디’를 뜻한다. 전문직 여직원보다는 사무보조 여직원 쪽에 가깝다. 저자가 야스코를 그렇게 부른 의도가 무엇이든, 일본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상징한다. 야스코는 1980년대 시행된 남녀고용기회균등법안의 ‘수혜’를 입어 도쿄전력에 입사했다. 일본에선 야스코가 자신을 이물로 취급하는 남성 중심 조직에 염증을 느껴 거리로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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