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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일” 환자와 함께 하려 했던 정신과 의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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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일” 환자와 함께 하려 했던 정신과 의사의 죽음

입력
2019.01.01 13:33
수정
2019.01.01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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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흉기에 찔려 숨진 임세원 교수의 환자 사랑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 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

31일 오후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서 상담 도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한 임세원(47) 교수의 생전 다짐이다. A교수가 ‘평생의 동지’라고 불렀던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생전 임 교수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1일 한국일보에 보내왔다.

백 교수는 “경찰조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겠지만 고인이 가려 했던, 가고자 했던 정신과 의사로서의 다짐과 명예를 알리고 싶어 임 교수의 글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아래 글은 지난해 10월과 12월 초 임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정리한 것이다.

흉부외과의가 되지 못한 이유

“1996년 인턴시절, 나는 흉부외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흉곽을 절개하고 나면 내 눈앞에서 박동치는 붉은 심장이 드러난다. 혈액을 심장 밖에서 순환시키는 체외순환기를 비롯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장치들을 조정하며 집도하는 흉부외과의사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보였다.

수술이 끝난 후 중환자실에서 밤새 환자를 살피는 레지던트 1년차 선생님을 돕는 것이 인턴인 나의 임무였지만 그것도 정말 멋있었다. 주치의인 1년차 선생님은 소변주머니로 노랗게 환자의 소변이 잘 나오자 정말 기뻐했다. 혈액과 체액순환이 원활하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나도 정말 기뻤다.

생면부지의 환자 곁에서 밤을 세우며 우리는 사명, 생명, 사랑, 인권 뭐 이런 거창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진짜 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흉부외과 의사가 되지 못했다. 어느 날 응급실로 폐암말기 환자가 들어왔다. 당시 당직이셨던 3년차 선생님은 내게 흉곽천자(thoracentesis)를 해보라고 하셨다. 이전에도 한 번 해봤던 술기였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3년차 선생님께서 이어 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그 환자에게 유독 미안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분이 사망했다. 환자의 죽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내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스스로 자책했고 절망했다. 아둔한 나의 손을 탓했다.

이런 간단한 술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능력한 내손으로, 내 눈 앞에서 누군가를 죽게 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흉부외과의 꿈을 접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함께 살자”

“나는 흉부외과와는 가장 거리가 먼, 아둔한 손으로도 최소한 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정신과의사가 되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외롭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는 절박하게 신호를 보내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외롭게 죽어간다.

가족, 친구, 동료 등 남은 사람들은 그 때 왜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자신을 자책하고 절망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한다. 먼저 보아주고,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 후 그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것이 정신과 의사다.

힘들어도 오늘을 견디어 보자고, 당신의 삶에 기회를 조금 더 주어 보자고,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함께 살아보자고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각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의 가장 힘겨운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한가득 입원해 있는 곳이 정신과 입원실이다. 사실 참혹함은 정신과도 만만치 않다.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기에 모두가 가장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보다 객관적 상황에 처해 있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그중에서도 정말 너무 너무 어려운, 그 분의 삶의 경험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함이 느껴지는, 그래서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도대체 왜 이 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 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

이렇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 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 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새 가득 찼다.

그 분들은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 하시고 나또한 그 분들에게서 삶을 다시 배운다. 모두 부디 잘 지내시길 기원한다.

이번 주말엔 조금 더 큰, 좀 더 예쁜 상자를 사야겠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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