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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으로 시민 찌르고 무차별 난사… 꼭꼭 숨은 ‘또다른 김소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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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으로 시민 찌르고 무차별 난사… 꼭꼭 숨은 ‘또다른 김소령들’

입력
2018.10.27 09:00
수정
2018.10.27 12:0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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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수뇌부에 가려진 5ㆍ18진압 가해자들] 

 5ㆍ18 첫 사망자 김경철씨도 가해자 오리무중 

 차모 대위, 군 자위권 발동 이전 시위대에 발포 

[저작권 한국일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 내용=그래픽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검시 내용=그래픽 송정근 기자

1980년 5월 22일쯤이었다.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연병장에 연행자들을 태운 헬기가 착륙했다. 이때 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대검)로 찔렀다. 부상자는 헬기에 실려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사망했다. 이 공수부대원의 범행은 당시 전교사 김모 준장과 백모 대령 등이 목격했다. 김 준장은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상급자인 자신에게도 대들었으며 술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위원회가 당시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한 사망자 총 15명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대검에 찔려죽은 희생자는 전재서(당시 26세)씨로 추정됐다. 위원회 보고서에도 술에 취해 기분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그 공수부대원의 신원은 나와 있지 않다. 위원회가 검찰처럼 강제수사권을 지녔다면, 공수부대원들에 대한 수사를 통해 가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수많은 살상은 이처럼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의 얼굴은 드러난 게 없다. 주남마을 버스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부상자 2명을 사살토록 한 김 소령의 경우처럼 군 내부에서 양심고백이 나와 가해자가 밝혀진 사례는 아주 드물다. 당시 공수부대원끼리도 정확히 누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몰랐을 수 있고,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서로의 신원을 함구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1995년 검찰 수사는 소극적으로 이뤄져 수뇌부만 기소하는데 그쳤고,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는 강제권이 없었다. 5ㆍ18 현장 범죄들의 진실은 밝힐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밝히지 않았던 측면이 크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최종 전남도청 진압이 끝난 후 사망한 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 미공개 사진이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최종 전남도청 진압이 끝난 후 사망한 희생자들의 비참한 모습.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 미공개 사진이다.

 ◇공수부대원들의 현장 악행, 그들은 누구 

5ㆍ18 당시 첫 사망자였던 김경철씨(5월 19일 오전 3시 사망)의 사례부터 가해자의 신원은 오리무중이다. 귀가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던 그는 갓 백일이 지난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고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귀가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당해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수많은 찰과상과 열상, 타박상 등이 나열돼 있고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 사인으로 적혀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5.18희생자 검시 내용 =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5.18희생자 검시 내용 = 송정근 기자

또한 11살 어린이를 난사해 살해하고, 13살 소년을 조준 사격해 죽이고 부상자를 이송하려는 택시기사를 끌어내 살해하고, 무장 시민을 찾는다는 이유로 민가를 수색해 청년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불응하면 사살한 공수부대원이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수사 및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저작권 한국일보] 5.18희생자 검시 내용 =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5.18희생자 검시 내용 = 송정근 기자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2007년) 내용을 보면, 공수부대원들은 부분적으로 과격진압을 인정하기는 했다. 위원회 면담에서 대부분 공수부대 출신은 머리를 가격한 사실을 부인했지만 일부는 훈련이나 명령에는 없지만 ‘흥분된 상태에서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했다’고 말했다. 당시의 사진자료 중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시위하던 사람의 상하의를 모두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연행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현장 공수부대 출신들은 이 같은 행위에 대해 ‘교범에는 없었지만 연행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옷을 벗겼다’고 진술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5.18희생자 검시 내용 =그래픽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5.18희생자 검시 내용 =그래픽 송정근 기자

검찰 조사를 통해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한 군인의 신원은 드러나 있다. 5월 19일 오후4시 50분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군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당시 11여단 63대대장 조모 중령은 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이 발포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포함한 군 수뇌부에서 자위권을 발동해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기 이틀 전에 발생했다. 보안사에는 “고교생은 특정 데모세력에 의해 무성 권총으로 사격,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키 위한 지능적 수법”이라고 보고됐다. 계엄군의 발포를 부인하며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조작한 것이다. 위원회는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19일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어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위협사격이 아닌 조준사격 사실을 인정한 공수부대원들도 있었다. 도청 앞 발포가 있은 뒤 공수부대원 일부에게 실탄이 지급됐으며, 그 중 일부는 주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의 임무를 수행했다. 11여단 62대대 소속 한모 일병은 광주관광호텔 옥상에 4명이 1조가 되어 올라갔으며 사수의 지시에 따라 조준경이 달린 총으로 주동자나 총기를 휴대한 시위대를 조준 사격했다고 고백했다.

과격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대검 사용도 들 수 있지만, 국방부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대부분의 공수부대 출신들은 대검 사용을 부인했다. 하지만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5.18. 20:15 대처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는 ‘7空輸隊銃劍鎭壓(공수대총검진압)’이라고 적혀 있다. 대검을 M16에 착검한 사례는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도망가는 시위대원을 착검한 채 쫓아가는 사진 속의 주인공은 7공수여단 서모 중사로 밝혀졌으나 그는 위원회 면담을 거부했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사건 때 사망한 여성은 왼쪽 가슴에 자상이 있었고, 5월 27일 도청에서 사망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씨도 우하복부 자상이 사인이었고, 전재서씨도 마찬가지였다.

1995년 검사로서 12ㆍ12, 5ㆍ18 2차 수사에 참여했던 임수빈 변호사는 “광주 피해자들 위주로 조사했는데, 당시 수사를 하면서 무척 많이 울었다”라며 “대한민국 국민을 지켜야 할 우리 군인이 국민을 찌르고 쏘고 해서 죽인,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당시 검찰이 전두환, 노태우 씨를 비롯해 16명의 신군부 핵심 인사들만 기소(1997년 12월 사면)한 것에 대해 “검찰은 현장에 동원된 군인들은 ‘인식 없는 도구’로 봤고, 그들을 도구로 이용한 수뇌부가 진정한 책임자라고 봤던 것인데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부마항쟁 계기, 5ㆍ18 ‘초동단계 강경진압’ 기조로 

국방부 과거사위에 따르면, 1979년 부마항쟁을 계기로 군 수뇌부는 초동 단계의 시위 강경진압 방침을 세우고 훈련을 지속해왔으며 이는 5ㆍ18 진압 작전과 관련해 시사점이 있다. 1979년 10월 ‘부마시위’를 진압한 뒤 보안사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초동 단계에 신속 진압’ 필요성을 제시하고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 한다’고 돼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광주로 투입되기 전에 시위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의 강도는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위원회의 면담조사에서 많은 공수부대원은 1980년 초반부터 이전보다 충정훈련 시간이 많아졌으며,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실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5.18. 23:00)에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 ‘주모자 체포’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이 있고,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 하도록 했다. 국방부 조달본부 물자과장 김모 준장은 “공수요원이 많이 지쳐 있을 뿐 아니라 보급이 제대로 안돼 라면류로 식사를 대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무활동(민심수습)을 전개하러 광주를 방문했던 호남출신 장교들도 5ㆍ18의 주요원인으로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지적했다. 국방대학원 김모 중령은 “군인들의 데모 진압이 너무 가혹하여 주민들의 증오감이 너무 큰 것 같다”고 했고, 5공병여단 장모 중령은 “최초 11공수단이 군중들에게 몽둥이로 과격하게 때리고 군홧발로 밟아서 ‘전라도 새끼들 다 때려 죽인다’고 하여 자극 받은 것이 크게 확대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국방부 과거사위가 확인한 진종채 2군사령관의 행적과 작전지침 문서에는 5월 21일 부분에 수기(手記)로 자위권 발동 관련 내용이 적혀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것으로 적혀 있지만, 회의 장소와 시간은 알 수 없었다.

5ㆍ18민주유공자유족회 정춘식 회장은 “그동안 우리 힘이 너무 약해서 아무리 해봐야 (진상조사와 처벌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며 “제보 받아놓은 것을 정리해서 진상규명위(출범을 앞두고 있는 5ㆍ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넘겨 조사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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