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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ㆍ액션 없어도… “범죄 영화 속 형사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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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ㆍ액션 없어도… “범죄 영화 속 형사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다”

입력
2018.10.18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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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 감독은 6년간 공을 들여 영화 ‘암수살인’을 완성했다. 그는 “지난한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 덕분에 시나리오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김태균 감독은 6년간 공을 들여 영화 ‘암수살인’을 완성했다. 그는 “지난한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 덕분에 시나리오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앞으로 한국에서 만들어질 형사 영화, 범죄 영화의 새로운 기준점은 ‘암수살인’이 될 것이다. 장르적 쾌감을 위해 손쉽게 동원되는 폭력 묘사나 화려한 액션, 강박적인 반전 없이도 ‘장르 영화’로서 본분을 다한다. 버림으로써 얻은 성취는 영화가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건 해결에만 집중하는 여느 범죄물과 달리 ‘암수살인’은 그간 간과했거나 무시해 왔던 범죄 수사의 이유와 목적을 환기한다. 바로 피해자에 대한 위로와 존중이다. 한 차원 나아간 문제의식이다.

김태균(47) 감독이 2012년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뤄진 암수범죄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피해자는 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암수범죄를 집요하게 쫓는 형사에게서 어떠한 ‘본질’을 발견했다. 방송 다음날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가 실제 주인공 형사를 만나 취재를 시작했다. 감옥에 갇힌 살인범 강태오(주지훈)의 추가 살인 자백을 믿고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 김형민(김윤석)의 이야기는 그렇게 완성됐다. ‘암수살인’이 300만 관객을 돌파한 17일 서울 강남구 쇼박스(‘암수살인’ 투자배급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피해자를 밝혀내야만 진실이 증명되는 아이러니를 통해 당위이자 이상으로서 형사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의 세계관이 낳은 산물이다. 김 감독은 ‘암수살인’으로 시대를 통찰한다. “지금 이 시대는 시스템이 본질을 장악해 버린 기형적 모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어요. 예컨대 전인적 교육을 담당해야 할 학교는 성적과 진학에만 매달리고,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할 경찰은 실적 압박에 시달리죠. 시스템만 남고 본질은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형사 분은 본질에 충실했어요. 이런 분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죠. 더 나아가 이 영화가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만이 아닌,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함의로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도 갖고 있습니다.”

살인범 강태오(왼쪽)와 형사 김형민의 심리전이 스크린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쇼박스 제공
살인범 강태오(왼쪽)와 형사 김형민의 심리전이 스크린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쇼박스 제공

김 감독은 “왜 암수범죄를 이야기해야 하나, 다른 범죄물과는 무엇이 달라야 하나”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실제 주인공은 ‘왜 암수범죄를 수사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있고, 유족이 있기 때문이다.” 출발점이 다른 시나리오는 기존 범죄물과는 결이 달랐고 그 때문에 제작에 적잖은 난항을 겪었다.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라서 따르는 제약도 있었다.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6년 걸렸다. “지난한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 덕분에 시나리오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창작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지지해 준 동료들과 제작사, 투자사, 배우들이 있어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좋은 시나리오는 좋은 배우가 알아본다. 김윤석은 시나리오를 받고 사흘 뒤 김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고, 두 번째 만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김형민 캐릭터의 의상에 대해 물어 왔다. 재킷이나 정장을 입힐 거라는 설명에 김윤석이 단박에 호응했다. 감독과 배우의 지향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기존 형사 캐릭터와 외형적 차이를 두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사건을 대하는 태도, 인간에 대한 예의가 김형민의 옷차림에서도 드러난다고 봤어요. 그래야 그의 무모한 수사에 설득력이 생길 수 있죠.”

김형민은 강태오가 건넨 살인 리스트와 무심코 흘린 단서들을 조합하고 추리해 진실에 다가간다. 영화는 김형민이 모르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지도, 더 많은 정보를 주지도 않는다. 그렇게 관객이 김형민의 수사에 적극 동참하도록 이끈다. 오락적 장치 없이도 이야기의 몰입감이 대단하다. 시나리오를 무려 20회 가량 다시 썼다고 한다.

김 감독은 살인범 묘사에도 신중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다양한 학설을 연구해 캐릭터를 설계했다. “이런 괴물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숨겨진 악마성이 불운한 환경을 통해 발현된” 강태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태오의 첫 살인 대상은 학대를 일삼던 아버지였죠. 도덕과 윤리, 자기 존재를 부정하면서 악마가 탄생한다는 은유를 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태오는 극단적인 염세주의자이기도 하죠.”

‘암수살인’의 또 다른 미덕은 계몽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론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냉정하게 현실을 진단한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다 해도 범죄는 끊임없이 벌어질 겁니다. 중요한 건 사건의 진정한 마무리입니다. 유족이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상업영화 진출이 늦었지만 그만큼 무르익은 연출력을 보여 준 김태균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진다. 고영권 기자
상업영화 진출이 늦었지만 그만큼 무르익은 연출력을 보여 준 김태균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진다. 고영권 기자

‘암수살인’은 김 감독의 첫 상업 영화 연출작이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억수탕’(1997) 조감독으로 영화에 입문해 ‘닥터 K’(1999)와 ‘세이 예스’(2001) 조감독을 거쳤고, 저예산 영화 ‘봄, 눈’(2012)으로 감독 데뷔했다. 조감독 시절에 선배 감독들과 제작자에게서 숱하게 연출 제안을 받았던 실력에 비하면 결실이 늦었다. 스승인 곽 감독은 ‘암수살인’ 총제작자로 나서 김 감독을 지원했다. “10여년간 여러 번 작품이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한편에선 강의도 하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 셋을 뒀고요. 그런데도 영화를 포기하지 않은 저를 두고 주변에선 ‘불가사의하다’고 우스갯소리도 했죠. 하지만 그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생활인으로서 일상을 잘 지켜낸 것이 영화에도 도움이 됐어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명확해지거든요. 제가 영화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내 가정과 내 삶입니다.”

‘암수살인’이 개봉한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김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진다. “인간의 욕망을 다룬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는 귀띔이다. “며칠 전 곽 감독님께 안부 문자 드렸더니 바로 전화하셔서 다음 작품 준비하라고 재촉하시더라고요. 빨리 시나리오 써야겠습니다(웃음).”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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