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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공항 거리 여전히 썰렁... ‘철도 빨리 착공’ 초조함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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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공항 거리 여전히 썰렁... ‘철도 빨리 착공’ 초조함 드러내”

입력
2018.10.15 04:40
수정
2018.10.15 17:0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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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홍 의원(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위원장, 민주평화당 사무총장, 고흥·보성·장흥·강진 지역구)은 지난 10월 4일부터 6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다. 다음 방문기는 10ㆍ4 공동선언 11주년 기념대회에 남측 정당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한 기록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500m 정도 떨어진 평양역까지 제지받지 않고 걸어서 출근길의 평양시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평양역사 위에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 ‘영광스러운 조선 로동당 만세!’ 라는 대형 홍보글씨가 눈에 띈다. 황주홍 의원 제공
[저작권 한국일보]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500m 정도 떨어진 평양역까지 제지받지 않고 걸어서 출근길의 평양시민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평양역사 위에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 ‘영광스러운 조선 로동당 만세!’ 라는 대형 홍보글씨가 눈에 띈다. 황주홍 의원 제공

처음 평양에 간 게 2005년 8월이었다. 13년 만에 다시 가보니 두 가지 변화는 확연했다. 하나. 미국과 남한에 대한 적대 현수막들이 완전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아직 ‘조선로동당 만세, 백두혈통 결사보위’ 같은 것은 여전했지만, 사방천지에 붙어 있던 그전의 ‘미 제국주의 타도, 남조선 괴뢰도당 섬멸’ 같은 내용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이 변화는 사람들의 언행에서도 확인되었다. 안내원들로부터 김영남(최고인민위원장), 리선권(조국평화통일위원장)에 이르기까지 미국 비판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뜨거운 민족애와 통 큰 아량의 지도자”(리선권)로 찬양될 정도였다.

다른 하나. 경제협력을 통한 ‘부분 개방’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것. 그때는 ‘개방’이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보이며 “이미 개혁개방을 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반박하기 일쑤였다. 이번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 같았다. 자기들이 먼저 경제협력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남한과의 그것에 각별했다. 공식행사에서조차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철도와 도로건설의 착공식을 조속히 가져야 한다”면서 “이는 남측 기업인들의 절절한 소망”(리선권)이라고도 했다. “동족을 불신하기보다 대담하게 믿고, 화해화합의 손을 절대 놓지말아야 한다”(박명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고 했다.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성과를 내려는 절박함과 보수정권 등장에 대한 우려도 숨기지 않았다. “북녘처럼 남녘동포도 힘을 합쳐 보수 타파 운동에 나서야 한다”(김영남)는 것이었다.

‘개방=체제불안정’이라는 인식으로부터 ‘개방=체제안정’이라는 인식으로의 급격한 전환이 느껴졌다. ‘개방→자본축적→자유화→체제동요’라는 것이 과거의 결론이었다면, 이제 이 폐쇄경제로는 경제성장과 주민 만족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인 것 같았다. ‘개방→경제성장→경제욕구 해소→일당체제 안정’의 중국ㆍ베트남 경로임이 분명해 보였다.

우리를 싣고 평양으로 떠날 우리 공군 군용기 앞에서 동료 의원들과 함께. 왼쪽부터 손금주, 서영교, 황주홍, 추혜선, 김태년 의원. 황주홍 의원 제공
우리를 싣고 평양으로 떠날 우리 공군 군용기 앞에서 동료 의원들과 함께. 왼쪽부터 손금주, 서영교, 황주홍, 추혜선, 김태년 의원. 황주홍 의원 제공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3년 동안 북한은 더디게 변해 있었다. 문 대통령과 함께 평양을 다녀온 정부관계자 한 분은 차가 너무 없어서 놀랐다고 했다. 자가용은 아예 없는 곳이라지만, 신호등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일행이 이용한 차량들에는 번호판도 붙어 있질 않았다. 택시에는 번호판이 있던데 우리 차량에는 없었다. 어떤 동료가 “아니, 왜 차에 번호판이 없어? 이거 완전 ‘대포차’네!”해서 웃었다. 택시가 좀 증가했고, 자전거도 꽤 늘어났다. 대부분 대중교통(전차와 버스)을 이용하거나 걸어다녔다. 그때는 멈춰서버린 버스를 뒤에서 사람들이 밀고 있는 모습도 몇 번 봤는데, 이번에는 그렇진 않았다. 전기 사정도 나아보였다. 짓다만 105층 류경호텔은 여전히 그 상태지만 이번에는 외관을 야간조명으로 밝히고 있었다. 평양의 살림집(아파트)마저 창이 깨져 있거나 밤에 캄캄한 곳이 많았는데, 이제 비교적 단정해 보였다. 옷차림과 혈색도 더 좋아보였다. 그러나 13년 동안의 변화치고는 분명 너무 더뎠다. 평양의 이 더딘 변화가 앞서의 확연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낙후의 초조함이 개방의 절실함을 낳은 셈이랄까.

더딘 변화 속에서도 개인숭배는 불변이었다. ‘3김’은 바로 신이었다. 그때는 김일성 배지가, 지금은 김일성ㆍ김정일 부자 사진이 들어간 배지가 ‘주민증’이었다. 전에는 100m 높이 흰탑에 붉은 글씨로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거기 ‘김정일 동지’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어디를 가도 ‘김일성 수령이 언제 지어주셨다, 김정일 영도자가 현지지도하셨다, 김정은 장군이 몇 차례 다녀가셨다’와 같은 안내현판이 꼭 걸려 있었다. 학생소년궁전 밖에 걸린 문구 ‘우리는 행복해요.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옛날 그대로였다. 시속 70km 정도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저속주행을 하는 곳이 있었다. 두어 차례 왕래하다 그곳이 김 부자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태양궁전 앞 대로여서임을 알게 되었다. 모두 그렇게 한다 했다.

그때나 이제나 북에 대한 첫 느낌은 폐쇄와 그에 따른 고립, 그것이었다. 평양공항의 국제노선이 중국과 러시아 딱 두 나라뿐이라니, 말 다했다. 이번 방북에 공항을 두 번 이용한 셈인데 우리 일행말고는 이용객이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평양에는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아침 해장국집도 저녁의 선술집도 은행도 신용카드도 없었다. 명함도 없고 당연히 연락처도 없다. 어찌된 건지 오토바이 한 대, 개 한 마리 보지 못했다. 몸에 밴 폐쇄성은 개인 간 소통도 허용하지 않았다. 노동당원 숫자가 얼마냐는 물음에 “그 많은 숫자를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는 식이었다. 휴대폰이 500만대 보급되어 있다지만, 길에서 휴대폰 들고 통화하는 사람 한 명 보지 못했다. 최고라는 고려호텔에 묵었는데 북한TV는 차단되어 있었다.

폐쇄고립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경제낙후다. 2016년 유엔 통계로 남한이 1인당 2만7,785달러일 때 북한은 665달러로, 남한의 40분의 1에 불과했다. 남북한 기술력 격차가 30년이라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10월 4일 평양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문을 나와서 찍은 사진. 뒤편에 우리 방문단 일행이 나오고 있다. 공항이 하도 한적해서 우리들끼리 한 사람씩 같은 포즈로 기념촬영을 했다. 황주홍 의원제공
10월 4일 평양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문을 나와서 찍은 사진. 뒤편에 우리 방문단 일행이 나오고 있다. 공항이 하도 한적해서 우리들끼리 한 사람씩 같은 포즈로 기념촬영을 했다. 황주홍 의원제공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이명준)은 개인(밀실)밖에 없는 남한과 전체(광장)밖에 없는 북한에 모두 절망한다. 그는 두 조국을 거부하고 목숨을 끊는다. 평양시내에 붉은 글씨로 “하나는 전체를 위해 있고, 전체는 하나를 위해 있다”고 걸어놨지만, 그들은 그저 ‘전체로서의 개인’들이었다.

이번에 15만명을 수용하는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했다. 본부석 맞은편 스탠드에서는 2만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카드섹션을 벌이고, 경기장 바닥에서는 연인원 6만여명이 온갖 군무의 장관을 연출하였다. 함께한 몇 분들 얘기대로 “북한이 아니고선 어느 나라도 할 수 없는 초대형 매스게임”이었다. 9월 9일(정권수립일)부터 10월 10일(당창건일)까지 매일 밤 7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공연한다는데, 우리나라나 다른 선진국 같았으면 학부모나 시민단체들이 난리를 쳤을 것이다.

우리 공군군용기를 타고 서울공항에 내리면서 몇몇 동료들은 “휴, 이제 다시 세상으로 귀환했네!”라고 말했다. 몇 분들이 휴대폰을 켜면서 “이제 비로소 연결되었다(connected)!”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양, 솔직히 절망이었다. 갈 길이 너무 멀고 험한 곳이 평양이었다. 끝은 아니었다. 현실은 비관적이지만, 낙관의 싹도 보이는 것이었다. 첫째. 무시무시한 리더십의 존재. 김정은의 권위는 ‘개발 독재’에 딱일 거다. 둘째. 시련과 제재에 맞서며 키워진 내성과 면역력. 북은 300만명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 시절을 살아남았고, 혹독한 제재를 자급자족적 강인함으로 버텨내었다. 셋째. 놀라움 그 자체인 주민들의 기질. 이번 방북 동안 주머니에 손넣고 걷는 사람 한 명 보지 못했다. 우연히 만난 ‘김대’(김일성대학) 학생은 우리를 보더니 “빨리 통일을 이루어주십시오”했다. 길에서 만난 학생들에게 말을 걸면 주저하거나 피하는 경우가 없었다. 우리처럼 짜증내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무경우를 보지 못했다. 북측은 ‘조국 통일을!’ 하면 ‘단숨에!’ 하는 건배제의를 자주 했다. 옥류관 냉면을 먹을 때는 ‘선주후면’(술 한 잔 한 뒤 면 먹기)이라며 농담도 곧잘 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이른 아침 모닝콜해주는 호텔안내원의 말이다. ‘수동식’ 인간미였다. 대체로 예의바르고 씩씩했다. ‘빛나는 조국’ 같은 매스게임에 수만 명이 군소리 없이 동원되는 비밀이 뭘까. 가혹한 체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 같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유럽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이란 단어가 사어가 되어 이제 전쟁은 없다고 반어적으로 얘기한 바 있다. 북에는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그 어떤 기상이 보유되고 있었다. 그건 반가움이자 두려움이었다.

폐쇄고립의 동토에도 가능성이 있더라는 말이다. 전제가 있다. 함께 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향후 연 15% 경제성장도 가능할 것으로 북한을 전망했다. 전제가 있었다. 대북 제재가 풀리고 개방경제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대북협력에 의지를 가진 문재인 정부가 있고, 핵무기는 최강의 협상카드가 되어 있다. 북에는 초유의 결정적 호기다. 세계가 ‘어떤 비핵화’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핵을 가진 채 경제협력의 문을 열지, 핵을 내놓고 새 길을 갈지, 세기의 고난도 ‘체스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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