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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칸 낭만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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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3등칸 낭만이 사라진다

입력
2018.09.27 17:42
수정
2018.09.27 19: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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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비좁은 플라츠카르타 객실 내부에서 승무원이 표 검사를 하고 있다. 타스 통신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비좁은 플라츠카르타 객실 내부에서 승무원이 표 검사를 하고 있다. 타스 통신

발을 쭉 뻗기도, 허리를 곧이 펴기도 쉽지 않은 이층 침대 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비좁은 통로 사이로, 생전 처음 본 낯선 이들과 밤새 대화를 나누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장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 낭만적인 장면들이 내년부터 사라질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정부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상징인 서민용 3등 객실 ‘플라츠카르타’ 현대화 작업에 본격 착수하면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러시아 국민과 전 세계 배낭여행객들은 “러시아의 낭만이 사라졌다”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6일(현지시간) 러시아 정부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플라츠카르타 객차를 2025년까지 각종 편의 시설이 구비된 신식 객차로 순차적으로 교체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객실은 크게 개방형인 플라츠카르타(6인실)와 밀폐형인 쿠페(4인실), 룩스(2인실) 등 3개로 나뉘는데, 플라츠카르타도 쿠페와 룩스처럼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름도 플라츠카르타 대신 ‘개방형 계획 객차’(Open Plan Carriage)로 변경을 고려 중이다.

당장 내년부터 대대적인 시설 개선 공사에 들어간다. 러시아 국영 철도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먼저 샤워 시설과 음료 자동 자판기 등이 구비되고, 블라인드 혹은 플라스틱 창문으로 구분되는 침실 공간도 따로 갖춰질 것으로 보인다. 대략 7,000개의 객차가 대상인데, WSJ는 2차 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철도 정비 사업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객차를 구입하는 비용만 해도 20억달러가 소요될 전망이다.

WSJ는 플라츠카르타 현대화 작업은 장기 집권을 공고히 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서방의 제재로 고달파진 경제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기반 시설 현대화로 내수 진작에 나서는 한편 국민에게 더 나은 사회 서비스를 제공해 민심을 잡으려는 복안이다. 최근 모스크바에 경전철을 새로 깔고, 도심 공원 정비에 나선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하다. 당장 저소득층이 이용하기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모스크바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장장 9,446km를 횡단하는 비용은 플라츠카르트 이용 시 200달러지만, 상위 객실로 올라갈수록 2배, 4배 가까이 높아진다. 이 구간 항공요금은 1,500달러에 달한다. 실제로 서민을 중심으로 러시아 국민 4명 중 1명꼴로 플라츠카르트는 유일한 장거리 여행 수단이었다. “철도 네트워크가 사라지면 러시아가 붕괴될 것”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승무원들 역시 자동화 기기에 밀려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다. 러시아 철도 산업은 전체 노동 인구의 1%에 해당하는 9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기존 인력은 새로운 노선에 재배치 될 것이고, 가격 인상도 없을 것이라고 일단은 선을 그었다.

정서적 상실감을 회복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 국민들에게 플라츠카르타는 단순한 객차가 아닌, 세대를 아울러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자 삶의 일부였던 탓이다. 은퇴한 광산 노동자 블라디미르 미하일로프씨는 “플라츠카르타는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러시아의 풍경뿐 아니라 진짜 러시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씁쓸해 했다. 사회 통합 기능이 저해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속하는 첼랴빈스크에서 5일 간 기차 여행에 나선 쿠즈네소프씨는 “수십 년간 러시아 전역을 달리며 11개의 시간대를 지나며 우리는 각 지역의 사람들과 음식, 풍습을 한데 묶었고, 서로 소통하며 경험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여행객들도 안타깝다는 반응이었다. WSJ 관련 기사에는 “드라마가 아닌 진짜 보통 러시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멋진 경험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갇혀 있는 방보단 훨씬 안전했다.” 등등 벌써부터 플라츠카르타를 그리워하는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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