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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랑 산다] 토끼털 목도리에서 나던 내 토끼 냄새

입력
2018.06.24 11:00
수정
2018.06.2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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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털 스카프를 판매하고 있는 해외 쇼핑 사이트. 해외 쇼핑 사이트 캡처
토끼털 스카프를 판매하고 있는 해외 쇼핑 사이트. 해외 쇼핑 사이트 캡처

집 안에서도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춥던 2014년 겨울. 외출을 하려고 옷장에 있던 검은색 토끼털 목도리를 손에 들었다. 토끼털 목도리가 한참 유행할 때 공동 구매로 2만 원에 구입한 중국 제품이다. 그런데 목도리를 목에 두르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냄새를 맡은 후에야 정체를 알게 됐다. 내가 키우는 토끼 ‘랄라’에게서 나는 냄새와 같았다. 그리고 랄라를 쳐다봤다. 그날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쓰던 토끼 목도리를 모두 버렸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는 토끼 모피 생산 과정을 고발한 동물보호단체들의 영상이 올라와 있다. ‘토끼 모피’(Rabbit Fur)로 검색하면 공장에서 이뤄지는 끔찍한 동물 모피 생산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국제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2015년 공개한 ‘중국 토끼 모피 공장’ 영상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영상에는 풍성하고 부드러운 털을 자랑하는 하얀색 토끼들이 등장한다. 작은 상자에 갇힌 토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짐짝처럼 던져졌다. 한 남성이 토끼 목덜미를 거칠게 잡고 전기 충격기를 토끼 머리 쪽으로 내리 꽂았다. 토끼는 힘 없이 정신을 잃었다. 이 남성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쓰러진 토끼들을 천장에 거꾸로 매달았다. 이후 토끼들은 칼을 들고 있는 남성에 의해 목이 베였다. 토끼 몸에서는 피가 쉼 없이 흘렀다.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 아시아 지부 유튜브 캡처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 아시아 지부 유튜브 캡처

생존과 패션을 위해 이용된 ‘토끼 모피’

모피는 인간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동물을 산 채로 잡아 모피를 얻어냈다. 생존을 위한 수단이던 모피는 16세기 유럽 전역에 바다삵이라고도 불리는 수변 동물인 ‘비버’의 모피 열풍이 불면서 ‘패션의 도구’로 변했다. 잔혹한 생산 과정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오로지 ‘패션 소재’로 소비될 뿐이었다.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털을 가진 모피 소재 패션 의류와 소품들의 인기가 치솟았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왕립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는 1890년대 어린 소녀가 입었던 하얀 토끼 모피로 만들어진 옷이 전시돼 있다. 당시엔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토끼 모피로 된 옷을 입었다. 19세기 출간된 ‘대도시 여성 노동’, ‘런던 사람들의 삶과 노동’ 등 도서들에는 여성들이 의류 제작을 위한 토끼 모피 산업에 종사했던 기록도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이미지다. 한 여성이 모피 옷을 입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기사와 관련 없는 이미지다. 한 여성이 모피 옷을 입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유럽 외에 호주에서도 토끼 모피 산업이 발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콜로니얼 타임스에 따르면 호주에는 원래 토끼가 살지 않았으나 1788년 이방인이 토끼 5마리를 처음 들여온 이후 숫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당시 호주 태즈메이니아 주의 주도 호바트에 있던 한 모자 회사가 엄청난 번식력으로 숫자가 크게 늘어난 토끼를 이용해 가죽 모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호주에서 본격적으로 토끼 관련 산업이 시작됐다.

이방인에 의해 우연히 호주 땅에 들어온 토끼는 농작물을 망치고, 초원의 풀을 모두 뜯어먹어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토끼는 고기, 모피 등을 활용해 돈을 벌 수 있는 호주의 중요한 산업이 됐다.

드라마 속 사모님 ‘모피’… 토끼는?

우리나라의 모피 열풍은 1960년대 한 의류 회사가 토끼털 의류를 생산, 수출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내수 시장을 겨냥해 모피 회사들이 국내에 공장 시스템을 갖췄다. 그러다 세계 시장으로 국내 업체들이 진출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중국 등에서 값싼 모피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당시 방송에는 모피 제품 광고가 유행이었고, TV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피를 입은 모습을 뽐냈다. 또 해외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모피를 호화롭고 부유한 느낌을 주는 장치로 활용하면서 국내에서도 명품 브랜드 모피 제품 인기가 치솟았다.

‘부의 상징’, ‘화려한 패션 소재’였던 모피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동물단체를 중심으로 윤리 소비 운동이 확산되면서다. 스위스 동물보호기구 등 동물단체들은 모피가 생산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세상에 전달했다. 동물들이 피부가 벗겨진 채 고통스러워하고,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장면들이 공개됐다. 이런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2000년 영국이 모피 농업을 금지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슬로베니아,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마케도니아 공화국 등이 차례로 모피를 퇴출시켰다.

국내에서도 ‘모피 반대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한국동물보호연합, 전국동물보호활동가연대 등은 정기적으로 모피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토끼 모피로 만들어진 토끼 모양 장식물들

지난해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토끼 모피로 만들어진 제품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난해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토끼 모피로 만들어진 제품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보통 모피하면 ‘의류’를 먼저 떠올리지만 모피가 사용된 패션 액세서리도 많다. 지난해부터 유행한 토끼 모양의 인형 열쇠고리와 ‘폼폼이’라고 불리는 액세서리 등은 대부분 토끼 모피들로 만들어졌다. 이들 액세서리에 사용된 모피의 원산지는 중국 토끼 모피 공장이다.

동그랗고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인기를 얻은 ‘폼폼이’는 여성 코트와 가방을 구매할 때 사은품으로 종종 제공됐다. ‘폼폼이’에는 어림잡아 토끼 한 마리의 털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폼폼이’는 인기가 많아 중국 쇼핑 사이트에서 직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토끼 인형 열쇠고리와 ‘폼폼이’를 손으로 만져본 적이 있는데 우리 집의 토끼 ‘랄라’를 만질 때와 같은 촉감이었다. 심지어 어떤 제품들은 토끼 냄새를 뿜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제품들이 토끼 모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피 반대 운동이 국내에서도 활발해지고 있지만 몸에 걸치는 옷에만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도리, 패션 소품 등 크기가 작은 물건에 들어가는 토끼 모피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모피 산업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은 모피가 어디에 쓰이는지 상관없이 똑같이 고통을 겪는다. 토끼도 마찬가지다. 생후 8주가 되면 털이 깎이거나 뽑히는데 이를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모피 공장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모피를 입지도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나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위해 토끼의 눈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토끼 랄라가 이동 가방 안에 들어가 있다. 이순지 기자
토끼 랄라가 이동 가방 안에 들어가 있다. 이순지 기자

이순지 기자 seria112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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