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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성적으로만 평가 받은 삶… 마음을 못 열어요

입력
2017.09.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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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jinjin@hankookilbo.com
김경진 기자 jinjin@hankookilbo.com

저는 차갑고 냉정한 사람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고민을 듣는 것도 지겹고 부탁도 귀찮기만 해요. 제가 필요할 때만 다정하고 타인에게 동정이나 연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외롭고 공허해요.

저는 고등학교 때 우울 및 불안증세로 1학년을 마치고 자퇴를 했습니다. 그전까진 늘 우등생이었어요. 중학교 때까지 교사들은 제 성적을 보면 모두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절하게 구는 교사들을 저는 속으로 비웃었어요. 공부를 잘하면 모든 일이 훨씬 쉬워진다는 걸 일찍부터 안 거예요.

부모님에게도 늘 동생들보다 제가 먼저였어요. 어머니는 언어폭력이 심했고 학원 교사인 아버지는 친구들 앞에서 저를 창피 주는 일이 잦았지만, 두 분 다 제 성적이 올랐을 땐 자부심을 숨기지 않으셨어요. 성적이 올라 받는 용돈보다 그 표정이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제 어깨를 두드릴 땐 모든 걸 보상 받는 기분이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달랐습니다. 우등생들 사이에서 저는 상대적으로 뒤쳐졌어요. 기숙학교였는데 부모님은 매일 밤 전화해 문제를 얼마나 풀었는지 물었고, 토요일엔 멀리서 오신 아버지에게 직접 수학 과외를 받았습니다. 교사들은 제게 관심이 없었고 저는 공부에 의욕을 잃기 시작했어요. 겨울방학에 집에 갔을 때 행동이 느려졌다며 부모님이 심하게 야단을 치셨어요. 저는 제 우울증을 과장해서 말해 병원에 데려가도록 했고, 결국 1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자퇴 후 1년은 힘든 시간이었어요. 집에 있으면 아버지의 한숨 소리밖에 안 들렸어요. 밖에 나가면 불안에 떨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체 왜 우울한지, 왜 불안한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가장 친했던 친구도 전화를 하면 다정하게 대해줬지만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립에 익숙해져 갔고, 다행히 열아홉 살 무렵엔 상당히 회복돼 약도 끊고 수영과 영어에 취미를 붙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너 다 나은 것 아니니? 대학 안 갈 거니?’라고 차갑게 물으시더군요. 자퇴 후엔 건강하면 그만이라며 무리한 학업을 강요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더니… 당장 부모님은 저에게 과외 선생님을 붙였고, 화가 난 저는 버스에서 수면유도제 40알을 삼키고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부모님을 위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과외는 즉각 철회됐고 이때부터 저는 자해로 부모님에게 뜻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대학에 대한 부모님의 강요를 뿌리치지 못했고 지금 저는 먼 곳에서 유학 중입니다. 벌써 4,5년 전 일이지만 혼자 있다 보면 어김없이 자퇴를 했던 때로 돌아가요. 돌이켜보면 저는 공부 외엔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집 분위기는 면학적이었지만 부모님은 제 교우관계는 어떤지, 사춘기 소녀가 왜 로맨스를 꿈꾸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처음으로 제 성관계 사실을 들은 부모님의 반응입니다. 상대는 사귀던 사람이 아니었고 저는 갑작스런 성관계 이후 불안했어요. 하지만 이걸 털어놨을 때 돌아온 건 아버지의 혐오 섞인 눈빛과 어머니의 욕설, 폭력이었습니다.

제 부모님도 딸이 좋은 데 취직해 결혼하고 살기를 바라시겠죠. 하지만 저는 부모님에게 상처를 돌려드리고 싶어 결혼도 출산도 하고 싶지 않아요. 공부가 재미있어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싶다가도, 그게 부모님이 원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면 하기 싫어져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피곤하고 서럽습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에 밤새 술 마시며 울다가도 다음 날 아침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냉정한 저로 돌아갑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저는 불행한 사람 같습니다. 차갑고 매사에 전략적인 제 모습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게 꺼려져요. 언제까지 이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살까, 이 모든 게 평생 나를 따라다니지 않을까, 두렵고 불안합니다.

오세연 (가명ㆍ22세ㆍ대학생)

세연씨, 당신은 스스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세연씨의 글에서 너무나 많은 감정을 느껴요. 세연씨는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진심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해요.

세연씨와 부모님의 관계는 언제나 지시 일색의 매우 일방적인 관계였어요. 아무리 자녀가 어리더라도 자기 의견을 말했을 때 부모가 생각을 바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의사를 시키고 싶은데 어느 날 의사 대신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자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래, 꼭 의사를 할 필요는 없지’라며 자기 생각을 바꾸는 부모들이 있어요.

그런데 세연씨의 부모님은 전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자식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좋은 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고 성공하는 것뿐이라 생각하고, 절대로 그걸 바꾸지 않았죠. 자식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면 할 수 없이 잠깐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지면 언제든 다시 손톱을 세울 준비가 돼 있어요. 세연씨는 이런 부모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뭔가를 결정한다든지, 자신의 입장을 차근차근 설명해 관철시킨 경험이 한 번도 없어요. 세연씨가 자식으로서,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존중 받을 수 있었던 건 좋은 성적뿐이었어요.

그러나 공부로 칭찬을 받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는 어렵습니다. 영유아기 땐 조금만 잘해도 ‘아이구 잘하네, 이런 것도 아네’하며 칭찬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을 넘어가면 공부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칭찬만 받는 건 불가능해요. 틀린 걸 지적하고 지도해줘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가 어릴 때부터 공부로만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 폐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건 공부가 재미있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부모가 거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기 때문이에요. 공부를 할 때 자신이 사랑 받는다고 느끼고, 그게 기쁘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공부로만 상호작용을 계속하면,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론 자녀와 긍정적 관계를 만들 통로가 사라져버려요. 쉽게 말하면 혼날 일만 남은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걸 감안하면 세연씨는 꽤 오래 버틴 편이에요. 중학교 때까진 잘 해냈어요.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예상치 못한 성적을 받았을 때 세연씨는 생의 근간이 흔들렸을 거예요. 성적은 세연씨 존재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그게 무너지면 다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당연히 불안하죠. 우울한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돈이 많은 걸로 인정 받은 사람들은 돈이 없어지면 죽고 싶어해요. 얼굴로 인정 받은 사람들도 자신이 늙는 꼴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 외에는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에요.

오롯이 자기 존재 자체로 인정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남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줄 거란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를 만나면 한없이 쪼그라들고 위축됩니다. 관계가 어려우니까 자꾸 안 하고 싶죠. 힘들어서 도망갔다가 외로워서 다시 다가가고, 다가갔다가 공격 받을까 봐 또 도망가고, 악순환의 연속이에요.

하지만 세연씨에겐 스스로도 잘 모르는 장점이 있어요. 먼저 사연을 보냈다는 건 세연씨가 이런 문제를 알고 있고 성장하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이건 아주 중요한 신호예요. 또한 글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따라가요. 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거죠. 이는 타인의 감정을 읽고 감응할 수 있는 기본을 갖췄다는 뜻이기도 해요.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세연씨는 공부로 인정을 받았지만 동시에 공부로 공격을 당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평생 자신을 괴롭혀온 테마로부터 도망 가지 않았어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정서 발달은 후천적이에요. 지금도 하나도 안 늦었습니다. 자신을 냉정하고 전략적인 인간으로 표현했지만 그 뒤엔 아직 펼치지 못한 따뜻함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세연씨 사연에서 그게 느껴져요. 차갑고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피하지 말고 직면해 보세요. 분명 쓰리고 아프겠지만 그 상처가 아물고 나면 그 후에 따라오는 벅찬 감동의 순간들이 있어요. 스스로를 알게 되고 인정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안정감, 평온함, 그리고 간간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들이 반드시 올 겁니다.

지금 물리적으로 부모를 떠나 있는 건 세연씨에게 아주 좋은 상황이에요. 부모님의 일방적 지시를 떠나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리고 스스로 성장시킬 환경이 갖춰졌어요. 하지만 혼자 힘만으론 할 수 없어요. 학교 안에 있는 상담실 등을 통해 전문가를 만나 심리치료를 받길 권해요.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갈등을 다시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더 잘 알아차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세요.

우리가 교육을 받는 궁극적인 목적은 더 인간다워지기 위한 거예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고 같이 아파해주는 것, 우린 결국 이걸 하기 위해 배우는 거예요. 지금까지 세연씨를 옭매왔던 성적, 학위가 아닌 진짜 공부를 시작할 수 있길 바랄게요.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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