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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고슴도치의 노동을 넘어

입력
2018.06.2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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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단축은 대범한 기획임에 틀림없다. 일과 노동 이외에 다른 삶의 원리를 허용하지 않는 과로 사회의 오랜 관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성복 시인의 말을 빌면, 피로한 노동으로 병든 사회가 된 지 오래지만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게 우리들이었다. 근면은 어떤 가치보다 우월했고 바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채워야 했다. 고슴도치 같은 삶이라고나 할까. 그리스 시인이자 용병이었던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계략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오직 큰 것 한 가지만 안다”고 했다. 사자 앞에서 여우의 계략은 다양하고 화려할 수 있으나 자신을 지키기엔 역부족이다. 고슴도치는 거친 가시 하나만으로 우직하게 버텨내며 살아남기에 여우를 능가한다. 그러나 영국 정치철학자 아이자야 벌린은 이 우화를 변용해 여우를 변호한다.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중심적 가치에 모든 것을 귀결시키기에 맹목적 일원론에 빠진다. 모순적이어 보여도 다양한 사고를 가능케 하는 다원주의를 옹호한 벌린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도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여우가 되길 제안한다.

일과 노동은 고슴도치의 가시와도 같다. 임금노동이라는 단일한 선택지만을 제공하는 산업사회를 모두 숨 가쁘게 살아왔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기를 실현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자유를 반납하고 얻은 소득으로 상품을 소비하면서 이를 행복으로 갈음했다. 소비가 행복을 대체하는 사이 문화도 상품이 됐다. ‘문화 상품권’이라는 기이한 유가증권이 별 거부감 없이 유통되는 상황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일ㆍ노동 중심의 사회임에도 일자리는 늘 위기이고 노동은 소외된다. 실업은 가장 큰 공포가 됐다. 소득 단절도 그러하거니와 나를 표상할 수 있는 대체물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과정은 자율과 창의가 존중되기보다는 지휘와 감독에 의해 통제되는 과정이기 일쑤다. 성과주의가 확산되면서 성과 달성도를 표시하는 일련의 숫자가 지휘ㆍ감독자를 대체했다. 자율이라는 헛된 이름 하에 스스로를 계발하고 착취하는 노동(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확산됨을 고려하면, 이 시대의 노동은 마치 자신의 가시에 찔리고 마는 고슴도치를 닮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새로운 노동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다. 그 기획은 노동과 자유를 조화시키는 비전을 담아야 한다. 일찍이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문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경제적 이성, 곧 더 많은 노동과 소득을 추구하는 관성이 삶의 중심원리가 된 노동사회는 외려 노동의 위기, 생태의 위기, 관계의 위기를 초래한다. 자유 시간, 자율과 창의에 기반한 문화 활동, 생태적 조화가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가 그가 말하는 문화 사회다. 탈(脫)노동이 당장 가능한 대안일수야 없겠지만, 노동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벗어나 자유와 창의, 문화 활동 등 다양한 중심을 탐색할 여우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새 노동시간제 시행을 앞두고 비관적 전망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저녁만 있고 삶은 없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며 소득 하락을 걱정하기도 하고, 시간은 줄어도 업무량은 그대로라 강도만 높아질 것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준비 부족 비난이 일자 결국 6개월의 시정 기간을 두기로 했다. 더디 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 당장의 충격은 불가피하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가 함께 나누어야 하겠지만, 대기업의 역할이 우선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혁신으로 뒷받침될 때 지속 가능한 만큼 대ㆍ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다질 생태계 마련이 시급하다. 중소기업과의 이익 공유제 확대 등 다양한 방안을 대기업이 먼저 실천해야 한다. 유연근로제 도입이나 연공임금제 개편 등도 유용한 대안이나 그 과정에 노동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직장 내 삶에서의 자율과 참여 역시 새로운 노동 기획이 담아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은종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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