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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어떻게 보내니,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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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어떻게 보내니, 집에 가자!”

입력
2017.02.0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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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할머니가 가난해도 항상 웃는 비결은? 콩 한쪽도 아기돼지 에밀과 나눠 먹는 여유! 느림보 제공
마르타 할머니가 가난해도 항상 웃는 비결은? 콩 한쪽도 아기돼지 에밀과 나눠 먹는 여유! 느림보 제공

한스 트락슬러 글그림ㆍ 이은주 옮김

느림보 발행ㆍ36쪽 ㆍ8,500원

“마음은 꽉 찼는데 배는 텅 비었다네. 꿈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요로레이디!” 알프스 산 중턱 작은 목장, 마르타 할머니가 오두막 앞에 걸터앉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속절없이 고운 저녁놀이 할머니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발치에선 아기돼지 에밀이 꿀꿀거리며 박자를 맞춘다. 파스텔 톤의 단정한 색감, 필력이 돋보이는 유려한 청색 선, 석판화로 짐작되는 담백한 그림이 청량하다.

병풍처럼 둘러싼 높푸른 산과 노란 꽃이 흩뿌려진 초원, 목장 주위에는 젖소 두어 마리가 한가로이 어슬렁댄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목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소도 양도 하다못해 닭도 없다. 그러니 먹고살기가 만만찮을 수밖에. 돈이 없으니 마을 식료품점에 가는 건 꿈도 못 꾼다. 먹을 거라곤 텃밭에서 가꾼 채소와 집 근처를 어슬렁대는 암소에게서 슬쩍 짜낸 우유가 전부인 셈. 마르타 할머니는 그걸 유일한 가족이자 말동무인 에밀과 나눠 먹는다. 저녁은 굶기가 일쑤다. 침대에 누워 낡은 요리책을 읽으며 주린 배를 달랜다. 이제껏 그렇게 견뎌왔다. 하지만 곧 겨울이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묘사는 촘촘하다. 밭일을 하고 장작을 나르고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만들고 요리책을 읽는 할머니, 그 옆에는 언제나 에밀이 있다. 그런 에밀을 데리고 할머니가 도살장으로 향한다. 굶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힘겹게 도착한 도살장 앞에서 할머니가 돌아선다. “에밀, 집으로 가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있지도 않은 사촌네 집에 간다며 돼지를 끌고 산을 오르내리는 할머니를 보며 마을 사람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마르타 할머니가 제정신이 아니야.” 그냥 두었다간 조만간 요양원에 보내야 할 텐데, 그럼 돈이 많이 들 테니 미리 돌보는 게 낫겠단다. 뭐라고? 작가가 쾅쾅 못을 박는다. 이 마을 사람들은 “돈을 너무 좋아해서” 돈을 쓰기 싫어하는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라고.

‘정이 넘치는 이웃’이 아니라, 가래로 막을 일이 생기기 전에 호미로 막으려는 ‘계산속이 빠른 사람들’이 바지런히 움직인다. 이것은 물론 복지 시스템에 대한 은유다. 동정과 봉사와 베풂이 아니라 권리와 책임과 나눔의 문제 말이다. 날렵한 풍자와 해학, 예리한 문제의식, 반짝이는 통찰이 화살처럼 날아든다. 이 그림책은 너무나 태연하게,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최정선ㆍ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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