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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왜 전라도 사투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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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왜 전라도 사투리인가

입력
2012.06.2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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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에 혹이 생긴 것 같어라우." 그녀는 접수직원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한번 봐줬으믄 좋겄는디요."

얼핏 보면 전라도 어느 병원 원무과에서 나눈 대화 같지만, '종양의학' 강의를 위해 펼쳐든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이라는 책 29쪽에 실린 대화다. 헨리에타 랙스는 미국 남부의 담배농장에서 담배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 자궁경부암에 걸려 사망했다. 1951년 사전동의도 없이 채취된 그녀의 암세포는 이후 의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세포인 '헬라 세포'로 명명되었고, 소아마비백신 개발, 유전자 복제, 인간 유전자 지도 구축 등 획기적인 연구에 기여했다. 상업적으로 거래된 헬라 세포는 수십억 달러에 달했지만 정작 그녀의 가족은 의료보험 혜택조차 못 받고 어머니의 세포가 전 세계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저자는 헬라 세포 연구에 관여한 모든 인물을 인터뷰하고 10년에 걸쳐 추적한 사실을 책으로 써내 역사적으로 취약했던 의학 연구 윤리에 재차 경종을 울렸다.

역자는 미국 남부 흑인 여성의 말투를 왜 전라도 사투리로 옮겼을까. 목차를 건너뛰어 '옮긴이의 말'을 뒤적이자 그 이유를 짐작할만한 대목이 나와 있었다. 원서에는 흑인들 특유의 생생한 사투리체 대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역자도 이들의 대화를 생동감 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고심했으며, 저자 역시 자신의 의도가 역서에 그대로 담기기를 주문했다고 한다. 역자는 출판사 편집부와 상의한 끝에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하기로 결정했고, 역자가 이 지역 사투리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까닭에, 남도 출신 소설가 한창훈 선생의 감수를 거쳤다고 한다.

흑인 영어 번역은 번역자에게도 꽤나 어려운 문제임을 검색 엔진의 힘을 빌어 어렵지 알게 됐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도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를 번역하면서 흑인 영어를 충청도 사투리로 번역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 끝에 화교들이 쓰는 한국어에서 따와 번역을 했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음을 토로했다고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이라는 소설의 도입부에도 1930년대 로스앤젤레스 뒷골목 술집에서 일하는 흑인 바텐더의 말투를 충청도 사투리로 옮겨놓은 대목이 나온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역자 박현주 선생의 약력에는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새겨져 있다. 흑인 영어와 충청도 사투리에 어떤 언어학적 유사성이 있는지 과문한 나는 잘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고종석 선생은 그의 책 <서얼단상>에서 한국 사회에 만연된 극우적 심성을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 지역주의고, 우리 사회 지역적 소수파의 입지는 다인종 사회에서 인종적 소수파가 놓여 있는 처지와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전라도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지 벌써 십 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후로 두 번의 경상도 출신 대통령을 거치면서 전라도 차별이나 지역주의가 완화됐다고 볼 객관적 근거는 거의 없다. 전라도 출신 대통령에 의해 사면된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은 얼마 전 육사 생도의 사열을 받으며 화려한 존재 증명을 했고, 민정당으로 정계 입문한 하나회의 막내는 곧 개원할 19대 국회의 의장으로 뽑혔다.

'깜둥이'나 '흑인' 같은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금기어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에둘러 표현하려는 시도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고 부른다. 나는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의 역자들이 PC함이 무슨 뜻인지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라도 출신'하면 '빨갱이'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한국에서 미국 흑인 남부 말투를 전라도 사투리로 옮겨놓은 역자와 출판사 편집부에 전라도 출신으로 매우 유감이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은 현재 오프라 윈프리가 영화로 제작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하게 되면 자막도 책의 선례를 따라 전라도 사투리로 옮기게 될 것인가? 미래의 일이지만 생각만 해도 꽤나 불편하다.

황승식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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