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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체제작가로, 변절자로 불렸던 시인

입력
2017.04.29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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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예브게니 예브투센코

1960년대 흐루쇼프 해빙기 러시아의 열망을 대변한 시인 예브게니 예브투센코가 별세했다. 맹렬한 반스탈린주의자로 전체주의에 저항했던 젊은 날의 그는 반체제 작가였고, 소비에트 안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추구했던 그는 체제 순응주의자였고, 조국 러시아와 함께 서방의 자유를 갈망했던 그는 기회주의자로 불리기도 했다. 냉전시대의 시인으로서, 그는 화해되기 힘든 저 모든 열망의 분출구를 시에서 찾고자 했다. 위키피디아
1960년대 흐루쇼프 해빙기 러시아의 열망을 대변한 시인 예브게니 예브투센코가 별세했다. 맹렬한 반스탈린주의자로 전체주의에 저항했던 젊은 날의 그는 반체제 작가였고, 소비에트 안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추구했던 그는 체제 순응주의자였고, 조국 러시아와 함께 서방의 자유를 갈망했던 그는 기회주의자로 불리기도 했다. 냉전시대의 시인으로서, 그는 화해되기 힘든 저 모든 열망의 분출구를 시에서 찾고자 했다. 위키피디아

영국 런던대 버크벡칼리지 교수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1959~)는 2011년 저서 ‘혁명 러시아 Revolutionary Russia’의 밑그림을 세 개의 세대론으로 그렸다. 처음은 당연히 1917년 10월 혁명 주역인 ‘올드 볼세비키(Old Bolsheviks)’다. 1870, 80년대 제국 말기에 태어나 차르 체제의 억압 속에서 청년기를 보낸 그들은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이념과 군대적 규율로 1차대전과 내전, 혁명을 주도했다. 두 번째는 스탈린 체제(24~53년)의 일국사회주의를 공부하며 성장한, 이른바 ‘브레즈네프 세대’다. 농업집단화와 급속한 산업화 및 사회주의 근대화, 애국주의, 전체주의로 단련된 그들은 흐루쇼프 유화체제(53~64년)의 강력한 견제세력이었고, 브레즈네프(64~82년) 집권기의 주역이었다.

1925~45년 태어나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개혁과 제한적인 해빙기(이른바 ‘Khrushchev Thaw’)에 활약한 어렴풋한 자유주의자들을 러시아에서는 ‘세스티데시아트니키(Shestidesiatniki, Sixties People)’, 서방에서는 줄여서 ‘식스티어스 Sixtiers’라 부른다. 그들은 스탈린 이전 사회주의 이상과 50, 60년대 서방의 비트-히피 문화에 관심을 쏟으며 전체주의에 저항했던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흐루쇼프 실각 후 탄압과 투옥, 강제추방과 망명 생활을 했고, 일부는 남아 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옐친 개혁ㆍ개방 시대를 지지하고 이끌었다.

대표적인 ‘식스티어스’로 꼽히는 러시아 시인 예브게니 예브투센코(Yevgeni Yevtushenko)는 그 두 ‘일부’의 경계를 넘나들며 비교적 복된 생을 살았다. 서방 사회는, 때로는 소비에트 정부 비판도 서슴지 않던 그를 용기 있는 반체제 작가로 대접했고, 감옥이나 망명지에서 험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진짜’ 반체제 지식인들 중에는 탄압도 별 제약도 없이 사는 그를 “당이 허용한 곳에만 돌을 던지는” 변절자나 위선자로 여기곤 했다. 그를 팬덤에 취한 광대쯤으로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칭 애국자로서 러시아와 함께 서방 세계의 자유를 함께 사랑했고, 사회주의 이념적 가치와 기질적 분방함을 시인의 열정으로 화해시키고자 했던 예브게니 예브투센코가 4월 1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의 첫 포문을 연 게 1956년 2월 제 20차 당대회에서였다. 스탈린을 업고 출세한 노소의 당료들 앞에서 그는 일인숭배와 철권통치의 숱한 범죄행위들, ‘반혁명분자’ 고문 숙청 학살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졸지에 그 범죄권력의 공범 혹은 방조자로 지목돼 사색이 된 참석자들에게 흐루쇼프는 연설 내용이 서방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며 함구령을 내렸지만, 이른바 그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은 은밀하게 대회장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소비에트 러시아는 변화의 기대와 퇴행의 불안이, 흐루쇼프의 괴팍한 변덕처럼, 혼란스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작가동맹의 검열에서 혁명 이념 위에 사적인 연애사를 둔 불온 소설로 낙인 찍혀 국내 출간이 불허됐다. 그는 57년 이탈리아에서 저 작품을 출간했다가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했고, 추방 당하지 않기 위해 58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해야 했다. 그리고 1960년 숨졌다. 파스테르나크의 관을 멘 이들 중에 예브투센코가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식스티어스’의 출정식이기도 했다. 런던정경대 냉전사학자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그들 식스티어스를 소비에트의 마지막 인텔리겐차라 규정하며 2011년 자신의 책 제목을 ‘지바고의 아이들 Zivago’s Children’이라 달았다.

예브투센코는 이듬해인 1961년 그의 대표시로 꼽히는 ‘바비 야르 Babi Yar’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바비야르 협곡은 41년 9월 나치가 유대인 3만여 명을 학살한 골짜기 지명. 우크라이나 당국은 사건 후 20년 동안 방치해 두던 바비야르를 개발해 대규모 운동장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다.

“바비 야르 골짜기에는 기념물 하나 없네/ 저 순정한 벼랑이 묘비이런가/ 그게 나는 두렵다/ 그날의 그 유대인들처럼/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고/ 마치 내가 그들 같아/ 내가 그 유대인들만 같아//(…) 군화발에 걷어 채여 나는 쓰러져 있고/ 그 야만에 조아려 부질없이 빌어보지만/ 아 저 고함소리/ 유대인을 죽여라! 러시아를 구하라!”(전문은 remember.org)

유대인 탄압과 학살에 관한 한, 소비에트 정부와 슬라브민족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저 시로 국가적ㆍ민족적 국수주의의 위선을 폭로했고, 단 한 마디 언급 없이 스탈린 치하의 야만을 환기시켰다. 당시 이미 이름을 나리던 그는 저 시로 더 유명해졌고, 신생국 이스라엘의 환호 속에 그의 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뉴스위크 모스크바 특파원을 오래 지낸 한 기자는 “러시아인에게 문학은 종교만큼 강력하다”고 썼다. 특히 시(인)는 10월혁명 붉은광장의 마야코프스키가 그랬듯이, 주요 국면에서 컬트적 열정을 결집하는 구호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의 시인은 시인 이상이다’란 말이 그런 의미일 것이다.

1976년 모스크바의 한 강당에서 시를 낭송하는 예브투센코. 그는 대중스타 못지않은 컬트적 인기를 누린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빼어난 낭송가였다. 타스통신, rferl.org에서..
1976년 모스크바의 한 강당에서 시를 낭송하는 예브투센코. 그는 대중스타 못지않은 컬트적 인기를 누린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빼어난 낭송가였다. 타스통신, rferl.org에서..

한때 축구선수가 되려고도 했던 그는 훤칠한 키와 금발에 푸른 눈을 지녔고, 훗날 영화를 만들고 출연도 했을 만큼 대중 앞에 나서는 걸 즐겼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가 61년 한 해에만 초대받은 시 낭송회가 250여 회였다. ‘바비 야르’를 자신의 교향곡 13번 부제로 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도덕은 양심의 자매다. 예브투센코가 양심을 이야기 할 때 아마 신이 그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기도를 할 때마다 그의 시를 거듭 암송하곤 한다”고 말했다.(NYT, 2017.4.1)

예브투센코는 1933년 7월 18일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이르쿠츠크 외곽 지마(Zima)에서 태어났다. 제국 귀족이던 조부와 외조부는 37년 ‘인민의 적’으로 몰려 굴라크에서 숨졌다. 아버지는 지리학자였고, 어머니는 훗날 가수로 활동했다. 예브투센코가 7살 되던 해에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는 어머니와 함께 2차대전이 날 때까지 모스크바에서 성장했다. 10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6살에 한 스포츠잡지에 그의 시가 실렸다고 한다. 51~54년 고리키 문학원(Gorky Institute of Literature)에서 공부했고, 19살이던 52년에 첫 시집 ‘미래의 전망 The Prospects of the Future’을 묶어냈다. 그 시집으로 그는 소비에트 작가동맹 최연소 회원이 됐지만, 블라디미르 두진체프(1918~1998)의 문제 장편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1957)를 공개적으로 옹호, “소비에트의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소설”을 편들었다는 이유로 두진체프와 함께 제명 당했다. 고향 농촌을 배경으로 개인의 서정을 주로 담았다는 그의 장시 ‘지마 역 Zima Junction’을 발표한 것도 그 해였다. 그가 연맹에서 제명을 당한 건 그의 ‘쁘띠적 감성’ 탓도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고집 세고 반항적인 청년이었고, 그 때문에 고리키문학원도 중퇴(퇴학 당했다는 설도 있다)했다. 하지만 그의 시들 중 일부가 노랫말로 쓰일 만큼 그는 대중적으로는 큰 인기를 누렸다. 데일리비스트(dailybeast.com)가 그를 러시아의 ‘밥 딜런’이라고 소개한 까닭은, 그의 시가 노랫말 같고, 그의 낭송이 가수의 공연처럼 드라마틱해서였다.

그의 시 ‘스탈린의 후계자들 The Heirs of Stalin’이 당 기관지 ‘프라브다’에 실린 것은 62년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방부 처리된 주먹을 불끈 쥐고/ 죽은 척 관 틈새로/ 그가 훔쳐보고 있다/ 누가 자신을 옮기려 하는지/ 그들을 모두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는 정부에 호소한다/ 능묘의 경비병을 두 배로/ 세 배로 늘리라고/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그와 함께 과거가 일어나지 못하게//(…) 과연 어떻게 그를 치워야 할까/ 그의 후계자들로부터”(부분) 흐루쇼프의 개혁파와 보수 강경파의 암투가 치열하던 때였다. 그의 시는 마치 흐루쇼프의 주문을 받아 쓴 것 같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 해 4월 러시아의 변화 특집과 함께 예브투센코의 얼굴을 표지에 담았다. 그는 흐루쇼프의 특사로 미국 등을 공식 방문해 로버트 케네디 등 정치인을 만났고, 프라브다의 특파원으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파리 리뷰’ 기자는 그 무렵의 그를 당의 준 공식 대변인 같았다고 소개했다.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체제가 갓 출범하던 65년의 봄 같지 않던 봄, 예브투센코는 소비에트 문학과 문화의 미래를 낙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시민의 삶의 온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러시아 인민들은 긴 고통을 겪어왔다. 평온함을 회복하고, 각자의 삶이 다시 꽃피도록 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불의와 어리석음과 피를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그 일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우리의 공산주의 사회에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안의 두려움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앞장서고 있다.” (theparisreview.org, 65년 봄호)

1962년 4월 13일자 'Time' 표지의 예브투센코.
1962년 4월 13일자 'Time' 표지의 예브투센코.

현실은 그의 기대와 사뭇 달랐다. 시인 작가들이 그 일에 앞장선 것은 맞았지만, 그들 다수가 검열당하고 감시 당하고 구속 당하고 유배 당하고 추방 당했다. 하지만 예브투센코는 대체로 무사했다. 원 없이 책을 냈고, 출입국 제제를 당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도 87년 노벨상을 수상한 반체제작가 요셉 브로드스키(1940~96)의 65년 재판 당시 동료 작가들과 함께 항의 서한에 맨 먼저 서명했고, 아르칸젤스크로 유배당한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8개월 만에 풀려난 브로드스키는 예프투센코와 근 2주 동안 함께 지낼 만큼 가까웠으나, 72년 6월 브로드스키가 추방당한 뒤로 둘은 원수처럼 지냈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브로드스키는 KGB의 결정 배후에 예브투센코가 있었다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데일리비스트, 위 글) 물론 예브투센코는 격렬하게 부인하며 브로드스키의 ‘배은망덕’을 여러 차례 성토했다.

65년 서방에서 책(‘A Voice from the Chorus’)을 허가 없이 가명으로 출간한 일로 고리키문학원 교수 안드레이 시냐프스키(Andrei Sinyavsky)가 7년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그 판결에 항의해 작가 63명이 서명했지만, 그 명단에 예브투센코는 없었다. 그는 시냐프스키의 형량은 과도하지만 그가 유죄인 건 사실이라는 입장이었다고 한다.(nysun.com, 2008.2.11) 앞서 63년 그 역시 작가동맹 승인 없이 프랑스에서 자서전을 출간,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스타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애국심이 결여된 작가”라며 그를 공개 성토한 게 그 일 때문이었다.(파리리뷰, 위 기사) 그 때도 그는 무사했다. 그의 책에는 스탈린 시대에 대한 성토로 넘쳐났고, 당시 권력자는 흐루쇼프였다.

그는 68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 침공을 앞장서 비난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시 ‘프라하의 러시아 탱크 Russian Tanks in Prague’가 공식 출판된 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1990년이었다. 70년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원고 밀반출을 두고 격분한 안드로프프 체제의 국가보안위원회(KGB)를 설득한 것도 그였고(솔제니친은 파스테르나크와 달리 74년 출국, 노벨상을 수상했다), 79년 소비에트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도 그는 당과 정부를 성토했다 프린스턴대 러시아과 교수 스티븐 코헨(Stephen Cohen)은 예브투센코가 비록 반체제작가는 아니었지만 그 나름으로 현실을 개선하고 개혁을 위해 헌신했다며 그런 면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옹호했다.

코헨의 부인이 미국의 좌파 매체 ‘The Nation’의 발행인 카트리나 밴든 후벌(Katrina vanden Heuvel)이다. 밴든 후벌은 1986년 초 코헨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해 예브투센코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예브투센코가 모는 차를 타고 가던 중 교통경찰의 제지를 당했는데, 그가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 못하더라는 거였다. 차 트렁크에는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잔뜩 실려 있었다.(thenation, 2017.4.5)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건 85년 3월이었지만, 당시 솔제니친의 책은 금서였다. 코헨이 말한 ‘그의 헌신’이 아마 그런 거였을지 모른다.

그의 시를 두고도 말이 많다. 이스라엘이 그의 노벨상 수상 로비를 집요하게 벌였다는 설이 있지만,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볼품없다는 거다. 그는 “큐브처럼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압축해놓은 볏단 같은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수선하게 정돈되지 않은 채 마른 베리 줄기들과 뒤섞여 유쾌하고 자유롭게 트럭 짐칸에 실려 흔들리기도 하는 그런 시가 나는 좋다”고 말했다.(nyt, 2017.4.5)

하지만 어쨌건, 그의 수많은 시와 노래가 러시아 현대사의 주요 구비마다 시민들의 마음에 온기와 희망을 북돋운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국정원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잇따르던 2013년 6월, 서울광화문광장에 선 고등학생 대표 70명이 낭독한 시 가운데 하나도 그의 시 ‘거짓말 Lies’이었다. 그 시는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네/ 허위를 진실인 양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로 시작해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한 걸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로 끝이 난다.

1991년 8월 보수 쿠데타로 고르바초프가 궁지에 몰렸을 때, 모스크바의 축구경기장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20만 군중 앞에서 그는 특유의 극적인 어조로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그는 스스로를 ‘포이티션(poetician)’이라 부르곤 했다. 시인(poet)와 정치인(politician)의 합성어였다. 그가 쓴 두 편의 장편소설 중 하나인 ‘Wild Berries’에는 두 청년이 러시아 시인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평하는 대목이 나온다. 한 청년이 “예브투센코는 어때?”라고 묻자 다른 청년이 “벌써 한물갔지”라고 답한다.(가디언, 2017.4.2) 그 무렵 예브투센코는 ‘포이티션’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 문학을 조금은 스산하게 되돌아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체된 소비에트 체제의 어제를 회고한 또 한 편의 소설 ‘Don’t Die Before You’re Dead’ 끄트머리에는 ‘잘 가, 우리의 적기 Goodbye, Our Red Flag’라는 시를 실었다. “나는 차르의 겨울궁전을 탐내지 않았고/ 히틀러 제3제국에도 환호한 적 없지/ 나는 당신들이 조롱하듯 부르는 빨갱이(commie)는 아니지만/그래도 적기(赤旗)를 어루만지네/ 흐느끼면서”

그는 모스크바 외곽 작가마을 페레델키노의 집과 91년부터 강의하던 미국 오클라호마 털사대학 인근 집을 오가며 살았다. 그는 첫 부인인 시인 벨라 아크마둘리나와 이혼한 뒤 3번 더 결혼했고, 5명의 자녀를 두었다.

93년 7월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서 열린 회갑연에서 그는 그날을 위해 지은듯한 시 ‘sixties Generation’을 낭송했다.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열광했고, 어떤 이들은 우리의 인기를 못마땅해했지. 어쩌든 상관없지.(…) 재능이 없다고, 변절자라고, 위선자라고 야유해도 좋아. 아무 상관 없지. 우리는 전설이야. 침을 뱉으렴, 이미 우린 불멸이거든!”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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