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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벚꽃처럼 흐드러질 계절이다

입력
2016.04.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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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고등학교 시절 손에서 놓지 못했던 ‘삼중당 문고’의 세 번째 책인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메밀꽃 필 무렵’의 첫 문단 마지막 구절로 기억한다. 아마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문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 문장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메밀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저 풍경을 마음 속으로 그릴 수 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을 때 마치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아 더 읽지 못하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나고 지금도 숨이 막힐 듯하다.

이때 내가 생각한 형용사는 ‘흐드러지다’였다. ‘탐스럽게 한창 성하다’라는 뜻이다. 어디서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평소에 쓰지도 않는 말을 어떻게 떠올렸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이 상황에 적절한 형용사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은 송기숙의 ‘녹두장군’에는 “들판에는 보리가 무럭이 자라고 산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걸로 보아 제대로 쓴 게 맞다. 흐드러지다라는 말은 자연발생적으로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훌륭한 형용사이다.

탐스럽고 무성한 것들이 세상에 두 가지일 리 없지만 흐드러지다라는 표현의 대상은 항상 작은 꽃이다. 요즘이 바로 흐드러진 봄꽃들을 볼 수 있는 세상이다. 봄꽃들은 모두 흐드러진다. 봄에 일찍 피는 꽃을 보자. 벗꽃, 매화,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철쭉 같은 꽃은 모두 자잘하다. (목련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다.) 이들은 왜 이리도 일찍 서둘러서, 심지어 철쭉을 제외하면 이파리가 나기도 전에 꽃들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것일까?

모든 생명의 최고 사명이자 존재 이유는 번식이다.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정을 해야 하고, 꽃이 수정을 하려면 곤충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곤충이 무슨 자선사업가가 아니어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취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꿀이다.

자잘한 꽃들은 곤충에게 제공할 꿀도 적다. 그러다 보니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큰 꽃과 경쟁하기 어렵다. (단 5일만 피는 것도 아니지만 자그마치) 삼백 예순날을 하냥 섭섭해 그리워해야 하는 모란이나, 화려한 겹꽃의 장미 또는 나리처럼 큰 꽃과 같은 시기에 피면 자잘한 꽃들은 벌에게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내가 벌이라고 해도 크고 화려한 꽃으로 날아가지 작은 꽃에서 수고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꽃을 서둘러 피우려다 보니 광합성을 해서 양분을 공급하는 이파리를 틔울 틈도 없다.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이다. 자잘한 꽃들은 큰 꽃보다 먼저 펴야 하고, 큰 꽃은 자잘한 꽃에게 순서를 양보한다.

자잘한 꽃들에게 서둘러 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략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무리를 지어서 흐드러지게 피는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 겨울 내내 굶주렸던 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예쁘게 보이겠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벌의 눈에 띄게 하겠다는 것이다. 작은 꽃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무더기로 펴서 나무 하나가 통째로 꽃으로 보이게 하겠다는 전략이다. 자잘한 꽃들이 각자 도생하겠다고 나서면 죽을 힘을 다해서 꽃을 피워 봤자 별무소득인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꽃들도 안다. 자잘한 꽃들은 당연히 뭉쳐서 흐드러지게 피워야 하며, 큰 꽃들은 홀로 피워야 한다. 이게 자연의 이치다.

인간은 자연에서 배운다. 이른 봄에 피는 자잘한 꽃들의 생존전략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면 봄꽃을 즐겨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가을철 단풍 놀이와는 달리 봄철 꽃구경은 멀리 갈 것도 없다. 어느 도시나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로 벚꽃이 지천이다. 물론 사람도 지천이다.

서울이라면 여의도 윤중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벚꽃을 감상하기 좋은 곳은 서대문의 안산이다. 안산은 安山이 아니라 鞍山이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는 뜻인데, 연세대학교 뒷산인 무악산과 같은 산이다.

안산의 벚꽃을 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종합적인 체험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코스가 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안산자락길→이진아기념도서관→서대문형무소역사관→영천시장’이 첫 번째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국제적인 규모는 아니지만 유수의 외국 자연사박물관 전문가들이 인정하였듯이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에서는 아주 뛰어난 곳이다. 자연사박물관을 관람하고 벚꽃 구경을 하면서 안산 자락길을 걸어보시라. 특히 이번 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벚꽃 아래에서 음악회도 열린다. 안산 자락길은 굳이 벚꽃이 없다 하더라도 걷기 좋은 길이다. 유모차와 휠체어도 다닐 수 있다. 나는 서울시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자락길을 넘어가면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있다. 책을 봐도 좋고 주변에서 쉬어도 좋다.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다. 여기서는 민족의 얼을 되새길 수 있다. 한나절에 자연과 역사를 한 데 아우르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상의 코스다. 일주를 마친 후 길건너에 있는 영천시장에서 요기를 하는 것은 덤이다.

정반대로 도는 코스도 좋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진아기념도서관→안산자락길→서대문자연사박물관→맛보치킨’이 바로 그것. 역사에서 시작해서 자연으로 끝나는 코스다. 닭은 살아 있는 공룡이니 치킨집에서 일정이 끝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총선을 며칠 앞두고 있다. 시민 한 명 한 명의 힘은 작다.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길은 벚꽃처럼 서둘러 흐드러지게 피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우리가 흐드러질 때다. 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로 끝난다.

서울특별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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