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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박유하 교수의 피소

입력
2014.07.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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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 달리 찾아보려다

표현ㆍ양심 자유 위협받는다면

부당 인권침해와 뭐가 다른가

박유하 세종대 교수에 대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민ㆍ형사 제소 소식에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경기 광주시 ‘나눔에 집’에 사는 9명의 할머니들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소송에 이어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판매금지가처분 소송이 덧붙은 데서 알 수 있듯, 지난해 나온 그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뿌리와 이파리)가 직접적 이유다.

이 책은 당시 언론의 엇갈린 보도에서 보듯, 적잖은 논란을 불렀다. 박 교수가 ‘그 옛날의 강제로 끌려간 소녀도 지금의 투사도 위안부의 전부는 아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적 용기가 긍정적 평가를 불렀다. 일본군 위안부의 전체적 실상이 그 동안의 통념과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짐작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전문가는 그 말고도 많았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침묵하던 분위기였다. 반면,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역사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적 부적절성과 결과적으로 일본 우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위험성이 부정적 반응의 주된 근거였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용기가 부러우면서도 시기적 공교로움이 부를 오해가 걱정스러웠다.

한일 양국의 여러 시각에 접한 경험에 비추어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오랜 논란을 부른 ‘강제동원’을 일부 사례로 한정하는 대신 대부분이 소개업자나 인신매매업자가 개입된 사기나 유괴 등의 결과로 파악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홈페이지의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에도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들의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연행 당시의 나이가 11세에서 27세에 이르며 대다수 취업사기나 유괴, 납치 등의 방식으로 동원되었다’고 나와 있다.

제법 시간이 흐르도록 뚜렷한 반발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4월말 그의 주도로 열린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 심포지엄을 전후해 반발 기류가 감돌았다. 그리고는 예상대로 박 교수 피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당사자 적격 문제가 고려된 결과겠지만,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전면에 나선 것은 다소 의외였다. 올 게 왔다는 생각 다음으로 은근한 분노를 느껴야 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헌법적 권리인 학문과 양심의 자유까지도 억누르려는 세태에.

박 교수는 역사 전공자가 아니다. 그러나 고전문학이나 근대문학 전공인 국문학자 가운데 고대사나 근대사 연구에서 두각을 보인 사람이 적지 않듯, 일본문학 전공인 그도 최근 몇 년 동안 근ㆍ현대 한일관계사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어문학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역사자료에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학계의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정통 연구자와 달리 인접 분야 출신의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시각과 접근법이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박 교수도 대표적 예의 하나다. 설사 그의 작업이 뚜렷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성향이 보수든 진보든, 새빨갛던 시퍼렇든, 개인의 지적 호기심, 나아가 헌법적 권리인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사회는 숨이 막힌다.

에드워드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주창한 랑케의 실증주의, ‘모든 역사는 당대사’라는 크로체의 상대주의를 극복하려던 카에게 역사는 현재의 자각과 미래의 전망이 매개하는 과거의 해석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역사의 ‘해석 공간’은 개인, 특히 연구자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이다. 그 동안 축적된 역사서술의 틈새를 살펴 그것을 메울 가설과 해석을 펼쳐 보일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책도 그런 기쁨의 산물이라고 볼 만하다. 최소한 우리 사회의 지적 관용과 학문의 자유를 환기시켰다. 그런 시각에 이견이 있다면, 학문적 논쟁을 통해 해소하거나 대비되어 마땅하다.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의 비판에 아무런 문제를 느낄 수 없는 이유다. 그런 정당한 경로가 아닌 지식 탄압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정치권력이 신물 나게 보여주지 않았나.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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