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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축구가 아니면 어디서, 원수의 대가리를 걷어찰까

입력
2018.06.22 18:5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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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일이다. 스코틀랜드 북부 연안부터 북해까지 펼쳐진 오크니 제도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전설처럼 도란도란 전해지는 이야기란다. 착한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살던 커크월이란 마을에 어느 날 스코틀랜드 침입자들이 나타났다. 특히 툭 튀어나온 앞니 때문에 ‘터스커’라 불리던 침입자의 우두머리는 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고약했다. 터스커의 폭정에 시달리던 커크월 주민들은 마침내 봉기했고, 교활한 터스커는 다른 섬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폭군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몰라 마을 사람들이 불안에 시달리자 어느 용감한 젊은이가 나섰다. 터스커를 잡아서 목을 자른 뒤 비참한 나날이 완전히 끝났다는 증거로 그의 머리를 갖고 돌아오겠노라고. 말을 타고 떠난 젊은이는 오래지 않아 터스커를 잡아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폭군의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던 중 툭 튀어나온 그의 앞니가 젊은이의 허벅지를 꿰뚫는 바람에 병균에 감염됐고 고향 커크월에 이를 즈음에는 빈사상태에 빠져버렸다. 죽을 힘을 다해 말을 몰아서 마을 중앙광장에 터스커의 피투성이 머리를 내던진 젊은이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영웅이 된 젊은이의 때이른 죽음에 상심하고 분노한 주민들은 폭군의 대갈통을 미친 듯이 발로 차며 거리를 누비고 울부짖었다.

이때부터 매해 마지막 날, 커크월 주민들은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팀을 나눠 터스커의 대가리를 차며 생존 의지를 다지는 경기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장의 대가리는 풀 뭉치로, 돼지 오줌보로, 독일 구두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꿰매 붙인 가죽 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육신 성한 커크월 출신 모든 남자들, 해외에 나가 성공한 중년의 사업가와 학자들까지 죄다 귀향해서 출정하는 광란의 대제전에서 적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은 한 치도 누그러지지 않아 팔다리가 부러지고, 피가 낭자하고, 고급 자동차가 박살나는 일이 속출한다. 고고학자 존 폭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현대 축구의 원형이라 경탄하고, 그곳 사람들이 고집스레 ‘커크월 바’라 부르는 경기다.

그리고 이 광적인 적의는 현대 축구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맨체스터 대 리버풀, 바르셀로나 대 마드리드, 영국 대 아르헨티나처럼 해묵은 지역감정과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맞수들 간 경기에서 아슬아슬하게 재현된다. 그뿐인가? 축구에서만이라도 적의 안마당을 유린하고, 골을 사냥하고, 승전보를 울리는 짜릿함이 없다면 대체 무슨 재미로 한일전을 즐기고 목이 터져라 “오! 필승코리아~.”를 외친단 말인가. 그러니까 한일전 승리를 두고 “도쿄 대첩” “후지산이 무너졌다”라던 중계 캐스터의 언급이야말로 본디 그렇게 태어난 축구의 속성을 가장 적절하게 녹여낸 은유일 수 있다.

다시 지구촌 최대 축구축제인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 축구 좀 안다는 이들의 소곤거림이 하나둘 들려왔다. 눈을 껌벅이며 그들은 말했다. “냉정하게 평가해서 현재 우리 팀은 역대 최약체거든. 전패만 면하면 다행이지.” 씁쓸한 침을 삼키면서 나는 외려 잘된 건지 모른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늦은 밤까지 TV 볼 체력도 안 되는 데다, 공놀이에 열광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나이가 됐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단속했건만 요즘 축구 때문에 힘들다. 조별 리그 1차선에서 우리가 스웨덴에 져버린 뒤의 허탈감은 어이없게 크고, 스타플레이어 없이도 펄펄 나는 다른 나라 선수들을 보자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러니 어찌 쿨하게 일본의 1승을 축하할 수 있을까. 그보다 한심스러운 건 벌써 며칠째 숙취만큼이나 힘든 수면부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내 처지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 어쩌면 나도 이번 기회에 현대 스포츠의 상업성과 폭력성, 집단주의를 경계하는 교양인으로 거듭날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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