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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화석 데이터 탐구 "멸종은 진화보다 불운 탓이다"

입력
2015.08.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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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 세계 거시적 비밀 캐내 "누구도 분석하지 않은 데이터"

학계 흐름 바꾼 아이디어 다윈 진화론의 빠진 고리 찾아

고생물학 르네상스, 그의 손에서… "가장 해박한 고생물학자" 평가

1933.4.24 ~ 2015.7.9 데이비드 라우프는 고생물학의 르네상스를 이끈 학자로 평가 받는다. 그는 방대한 화석데이터베이스를 근거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 종의 멸종이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진화론적 법칙 탓만은 아니며, 오히려 대부분 소행성 충돌 등 ‘불운’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Getty Image
1933.4.24 ~ 2015.7.9 데이비드 라우프는 고생물학의 르네상스를 이끈 학자로 평가 받는다. 그는 방대한 화석데이터베이스를 근거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 종의 멸종이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진화론적 법칙 탓만은 아니며, 오히려 대부분 소행성 충돌 등 ‘불운’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Getty Image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은 무지, 특히 종교적 무지에 맞설 수 있게 한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그의 진화론은 유전학을 비롯, 분자생물학과 신경생물학 사회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이 잉태된 거대한 수원지였고, 심리학 사회학 윤리학 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생물학을 오늘의 학문으로 이끈 동력도 진화론이었다. 다만 진화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뎌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지질학에 종속된 더부살이 학문이었다고 한다. 고생물학이 화석을 발굴하고 어떤 동물 뼈인지 확인하고 관찰한 바를 기록하는 일에서 탈피한 건 60년대 말 무렵부터였다. 진화론의 관점, 즉 고대의 생물과 현대의 생물을 잇는 화석의 변화를 연구하고, 생물 세계의 거시적 작동원리와 비밀을 캐기 시작한 거다. 그 선두그룹에 데이비드 말콤 라우프 (David Malcolm Raup)가 있었다. 7월 9일 작고. 향년 82세.

영화 ‘쥬라기공원’의 그랜트 박사가 백악기 지층의 흙먼지를 마셔가며 벨로시랩터 화석을 발굴할 때, 데이비드 라우프는 축적된 화석 데이터베이스를 발굴했다. 그는 “누구도 분석하지 않은 방대한 데이터가 거기 있어 고생물학자가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뉴욕타임스, 2015.7.15) 그랜트가 죽은 공룡의 흔적으로 산 공룡의 비밀을 탐구했다면 라우프는 죽음 자체, 개체의 사인(死因)이 아닌 종의 진화와 멸종의 비밀을 탐구했다. 비밀의 열쇠는 개별 학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근친 학문은 물론, 기상학 환경학 천체물리학 등과의 학제적 연구도 불가피했다. 그 과정에서 긴장을 야기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과학의 미덕 중 하나는 어설픈 화해나 타협으로 퇴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가설이 ‘과학’인 한, 권위도 불화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우프는 지구에서 생명의 행진이 시작된 이래 사라져간 수많은 종들이 모두 고전 진화론이 가르치듯 적자생존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오히려 진화와 직접 관련 없는 외생적 돌발 변수가 주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생물 종 다양성이 최근 5억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통설에도 맞섰다. 공룡 멸종이 소행성 충돌 때문이라고 주장한 루이스와 월터 앨버레즈 부자의 가설(1980년)로 학계가 술렁이던 83년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구 최악의 소행성 충돌이 2,600만년 주기로 일어났고 그 결과 다섯 차례에 걸친 ‘대멸종’이 빚어졌다는 ‘소행성 충돌 주기설’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라우프는, 개별 가설의 입증 여부와 별개로, 고생물학(과 과학 일반)에 새로운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었다. ‘단속평형이론’(장기 안정적 진화와 더불어 환경 압박에 의한 급격한 진화와 종 분화를 주장한 학설)의 학자로 그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해박한 고생물학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91년 저서 ‘멸종- 불량유전자 탓인가, 불운 때문인가’(문학과지성사, 장대익ㆍ정재은 옮김, 2003)의 제1장에서 라우프는 이렇게 물었다. “지구상에는 수백만(약 4,000만 종 이상) 종의 서로 다른 동식물이 존재하지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50억에서 150억 종에 이르는 생물들이 지구를 거쳐갔다. 그러니까 약 1,000분의 1에 해당하는 종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셈이다. 99.9퍼센트가 실패라니, 참으로 형편없는 생존 기록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주요한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종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떻게 사라졌을까?”(표현 일부 수정)

대답은 책의 부제처럼 크게 둘로 나뉜다. ‘불량 유전자(전염병이나 감각지각 부족, 부실한 번식능력 등)’탓이거나 ‘불운(기후급변, 해수면 상승,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 등)’탓이거나. 데이터 분석과 개별 원인들을 대조한 뒤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분명히 멸종은 불량 유전자와 불운의 조합으로 일어난다. 어떤 종은 그들의 서식지에서 잘 대처하지 못해서, 또는 우세한 경쟁자나 포식자에게 밀려서 소멸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나는 대부분의 종이 불운해서 소멸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전의 진화에서 예상치 못했던 생물학적이거나 물리적인 압박에 직면했거나, 자연선택으로 적응할 만큼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버린 것이다.”(책 244쪽)

공룡이 새가 되고 땅이 풍화해 퇴적되듯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생명진화가 오래 천천히 진행돼 이 생명 세계의 풍경을 모두 이루었다는 관점에 그는 저렇게 어깃장을 놓았다. 다만 오해를 의식한 듯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불운에 의해 일어나는 멸종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대한 도전인가? 그렇지 않다. 자연선택은 눈이나 날개처럼 정교한 적응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자연주의적 설명이다. 자연선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윈주의는 살아있고 건재하다. 그러나 다윈주의가 단독으로 작용하여 현재의 다양한 생명체의 모습을 생성한 것은 아니다.”

저렇듯 겸손한 한 자락에도 불구하고, ‘교조적’ 다윈주의자 일부는 그의 가설을 못마땅해 했던 듯하다. 그는 “지금 우리에겐 약 25만 종의 화석 종이 있지만 다윈의 시대에 비해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우리는 다윈의 시대보다 진화적 전이(evolutionary transition)의 예를 오히려 덜 가지게 됐다”고 반박도 했고, “새로운 이론은 결백을 입증할 때까지 유죄이고, 기존 이론은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결백한 법이다.(…) 대륙이동설도 결백이 입증될 때까지 유죄였다”는 식으로 푸념도 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지켰다. 그는 “다윈은 성경과 같다. 당신이 뭘 원하든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며 과학의 몽매주의와 진화론의 도그마티즘을 성토하기도 했다.(telegraph, 위 기사) 그는 “다윈은 물론 옳다. 하지만 그는 진화의 전체 그림의 일부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가 빠뜨린 부분들이 바로 (우리가 겨냥해야 할) 기회들이다”라고 말했다.

창조론자나 지적설계론자들이 그의 이론을 왜곡해 ‘고생물학과 다위니즘의 불화’라는 식으로 진화론을 공격하는 데 동원하는, 황당한 일도 물론 있었다.

라우프는 지난 5억년 사이 생물 종이 급격히 늘어나 오늘날과 같은 종다양성을 유지하게 됐다는 학계의 통념에도 맞섰다. 그는 최근 종일수록 얕은 지층 화석으로 남아 발굴 가능성이 높다는 점 등을 들어, 화석에 근거해 종 다양성을 평가하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인 시카고대 마이클 푸트(Michael Foote) 교수는 “라우프의 주장처럼 종 다양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한 게 아니라면 다양성을 통제하는 어떤 요인들- 종간 경쟁이나 생태계에 대한 물리적 간섭(physical perturbations)이 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NYT, 위 기사)

라우프의 가설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것은 동료학자인 존 세프코스키(John Sepkoski)와 함께 발표한 ‘대멸종 주기설’일 것이다. 2억5,000년 동안의 해양생물 멸종 과정과 시기를 공동 연구한 그들은 1983년 오직 통계에 근거해 대멸종 2,600만년 주기설을 발표했다. 네메시스 가설, 즉 태양의 가상(假想) 쌍성인 ‘네메시스Nemesis’가 일정한 주기로 공전하면서 지구에 혜성 소나기를 퍼부어 대멸종을 초래했을지 모른다는 거였다. 네메시스의 존재도, 대형 운석의 지구 충돌 근거도 아직 과학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앨버레즈의 혜성 충돌 가설은, 과연 혜성이 공룡 멸종의 원인인지와 별개로, 지구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이 입증돼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우주과학 기구들이 공동 연구 중인 이론이다. 그가 위 책에도 썼듯이 1908년 퉁쿠스카에 떨어진 히로시마 원폭의 1,000배 위력을 가진 혜성이 “여섯 시간만 늦게(지구의 4분의 1회전) 지구에 부딪쳤다면 페테르스부르크가 날아가버렸을지 모른다.”97년 한 인터뷰에서 라우프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대멸종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라우프는 1933년 4월 24일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휴 라우프는 하버드대 식물학 교수였고, 그의 어머니(Lusy) 역시 지의류를 연구하는 식물학자였다. 그는 두 살 무렵서부터 북극 등지로 부모의 채집 여행을 따라 다녔다고 한다. 메인주 콜비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했고, 수학과 회계학을 부전공했다. 시카고대학에서 고생물학 석사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뒤, 캘리포니아공대와 존스홉킨스대 로체스터공대 등에서 강의했다. 그는 빼어난 젊은 고고학 및 고생물학자에게 수여하는 찰스 슈쳐트(Charles Schuchert) 상의 첫 수상자(1973년)였다. 1977년 시카고대로 복귀해 여러 연구소와 박물관 운영 책임을 맡았고, 95년 은퇴해 명예교수가 됐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국내에 번역된 건 위에서 언급한 책 한 권이다.

그의 컴퓨터 데이터 분석 연구는 초창기부터 시작됐는데, 멕시코 만에서부터 알래스카에 이르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성게의 한 종인 연잎성게(sand dollars)의 생체 샘플과 화석표본 1만개를 수집, 연구하면서 컴퓨터와 친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Telegraph, 2015.7.20) 조개류의 껍질을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진화의 어떤 변수가 무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컴퓨터로 시뮬레이팅해 자극과 진화의 구체적인 양태를 연구하기도 했다.

티라노사우르스가 포식공룡인지 청소공룡인지, 벨로시랩터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가설로 존재하는 까닭은, 고생물학이 실험이나 계산으로 검증될 수 없는, 오직 새로운 발견으로 확인하며 더듬듯 나아가야 하는 학문인 탓이 클 것이다. 라우프의 여러 주장과 추론도 그래서 대부분 가설 영역에 머물러 있다.

과학을 움직이는 것은 의견이 아니라 아이디어라는 말이 있다. 고생물학자인 신시내티대학 아놀드 밀러(Arnold I. Miller) 교수는 “학자의 커리어를 통틀어, 동료 학자들로부터 학계의 연구 어젠다를 바꿀 만한 통찰력 있는 아이디어로 평가 받는 이론을 하나만 발표해도 과학자들은 큰 행운이라 여긴다. 데이브 라우프는 연구자로서 40여 년간 커리어를 쌓아오는 동안 줄잡아 5차례 정도 그런 행운을 누렸다”고 평가했다.(뉴욕타임스) 그의 제자로 UC버컬리 통합생물학과 교수겸 캘리포니아대 고생물학박물관장 직을 맡고 있는 찰스 마샬(Charles Marshall)은 “데이브 전까지 고생물학 훈련은 ‘이게 뭐냐’에 집중됐다면 그는 그것이 어떻게 과거로부터 비롯돼 여기까지 이어져왔는지를 생각하게 했다”고 말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라우프에 대한 헌사는 위 책 ‘멸종’의 추천사에 나온다. “데이비드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만이 가능할 것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 엉뚱하되 적어도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이론을 생각하고,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할 정도로 확장될 수 잇는지 점검하라! 이 책은 타당한 우상 타파가 무엇인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데이비드 라우프는 최고 중 최고이다.”

라우프는 낙상으로 인한 경막하혈종 수술 후유증으로 숨졌다. 87년 결혼한 두 번째 아내 쥬디스 야마모토가 그를 임종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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