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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사극 보며 '정조' 검색하고 '서브앓이'까지...할리우드가 K스토리에 빠진 이유

입력
2022.10.13 04:30
수정
2022.10.13 07:53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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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대안, K스토리]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제공

K드라마에 빠진 미국 루이지애나주 출신 셜리사(36)는 요즘 ‘서브앓이’ 중이다. ‘서브앓이(Second Lead Syndrome)’는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생긴 미국 내 신조어로 주인공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캐릭터(서브 주연)에 애착을 느끼며 응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서브 주연은 삼각관계의 로맨스물에서 주로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순수하며 헌신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지난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케이콘(KCON)에서 만난 그는 “두 번째 주연이 나와 더 가까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며 “한국 드라마는 마음속 감정들을 잘 끄집어내, 드라마를 보다 자주 운다”고 말했다. 그가 꼽은 최애 한국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 ‘킬미, 힐미’ ‘그녀는 예뻤다’다.

순수한 감정 외에도 그가 K드라마의 매력으로 꼽는 것은 리얼리티다. "한국 드라마가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라면 미국 드라마는 비현실적인 동화 같아요. 한국 드라마를 보면 가족 문제나 경제적 문제처럼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합니다. 미국 청년들은 등록금 때문에 빚을 지고 부부들도 집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선 그런 내용을 보기 어려워요.”

K스토리, 중국·일본 이어 미국을 사로잡다

미국이 ‘K스토리’에 빠졌다. KBS ‘굿닥터’(2013) 리메이크로 K스토리의 가능성을 감지한 미국 드라마 제작자들은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성공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 이야기꾼들에게 구애를 펼치고 있다. 태평양을 건너온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영화 ‘미나리’의 아카데미상 수상과 애플TV플러스가 제작한 ‘파친코’의 성공에 힘입어 한인 2세 작가들과 제작자, 감독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제공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제공

미국에서 제작이 추진되는 K스토리의 드라마·영화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인터스텔라’ 등을 제작한 베테랑 프로듀서 린다 옵스트는 CJ ENM과 손잡고 K팝 소재 코미디 ‘K팝: 로스트 인 아메리카’를 준비 중이고, 한국 팬들에게 ‘밀양 박씨’로 불리는 한국계 미국인 가수 앤더슨 팩은 K팝 소재 영화 ‘케이팝스’로 감독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다. 'SKY 캐슬' ‘사랑의 불시착’의 리메이크가 확정됐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역시 미국의 여러 제작사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 ‘파친코’에 이어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쓴 ‘마이너 필링스’(캐시 박 홍), ‘H마트에서 울다’(미셸 자우너), ‘서니 송 윌 네버 비 페이머스’(수잔 박) 등이 미국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 ‘기생충’ ‘극한직업’ ‘악녀’ ‘지구를 지켜라’ 등 미국에서 리메이크되는 한국 영화도 줄을 잇고 있다.

할리우드의 주요 K스토리 프로젝트

할리우드의 주요 K스토리 프로젝트


영화 '기생충'은 빈부격차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차가운 유머로 다루며 세계인의 공감을 끌어냈다. CJ ENM 제공

영화 '기생충'은 빈부격차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차가운 유머로 다루며 세계인의 공감을 끌어냈다. CJ ENM 제공


현실적 주제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구현

미국이 K스토리에 빠진 이유는 뭘까. 현지의 제작자들과 시청자들이 첫째로 꼽는 것은 현실적 주제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내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미국 할리우드물이 슈퍼 히어로의 영웅 서사에 빠져 있는 동안 재미와 리얼리티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린지 고프먼 그래티튜드 프로덕션 대표는 본보와 이메일로 만나 “‘오징어 게임’ ‘기생충’ ‘파친코’ 같은 작품은 모두 세계 어디에 살든 보편적으로 호소력을 지닌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굿닥터’의 리메이크 가능성을 알아보고 4년간 개발에 매달린 끝에 시리즈 제작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고프먼 대표는 “특히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은 계급 간 불평등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이는 미국 사회를 지배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SKY 캐슬' 등의 히트작이 공통적으로 현실 속의 불평등 문제나 차별과 억압을 대중적으로 풀어낸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시아 대중문화 전문가인 크리스털 앤더슨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처음 본 한국 드라마가 '꽃보다 남자'였는데 일본이나 대만 버전과 달리 한국 버전만 흥미를 끌었던 건 캐릭터 간의 계층 차이를 시각적 요소와 스타일, 스토리를 통해 전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KBS '굿닥터'를 리메이크한 미국 ABC의 드라마 시리즈 '더 굿닥터'. ABC 제공

KBS '굿닥터'를 리메이크한 미국 ABC의 드라마 시리즈 '더 굿닥터'. ABC 제공

한국의 음악 추리 예능 ‘복면가왕’과 엠넷 ‘너의 목소리가 보여’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해 큰 성공을 거둔 크레이그 플레스티스 스마트독 미디어 대표의 진단도 비슷하다. “어떤 주제는 보편적이고 영원히 대중적입니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 ‘파친코’는 그런 주제를 아주 솔직하고 독창적이며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래된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 한국은 그걸 굉장히 잘합니다.”

신문 헤드라인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점은 한국 콘텐츠의 장점으로 꼽힌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중역 중 한국 콘텐츠에 대해 가장 정통한 인물로 꼽히는 애덤 스테인먼 워너 브러더스 인터내셔널 TV 제작 부문 부사장은 3년 전 미국에서 리메이크할 만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찾던 중 ‘SKY 캐슬’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명문대 부정 입학 스캔들과 판박이처럼 닮았기 때문이었다. 워너 TV 회장도 "이 드라마는 꼭 사야 돼"라며 즉각 관심을 보여 리메이크 제작이 확정됐다.

스테인먼 부사장은 이메일을 통해 “한국에선 드라마든 예능이든 국내에서나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중요하게 다룬다”며 “‘써치’ ‘D.P.’ 같은 드라마나 (치매 노인이 식당에서 일하는 내용의) ‘주문을 잊은 음식점’ 같은 예능이 대표적인데, 쉽지 않은 주제를 가져와서 유쾌하게 풀어내는 게 K스토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이야기 중엔 정말 엉뚱하고 별난 이야기가 많다”며 K스토리의 또 다른 매력으로 “강렬하고 흥미로운 인물과 유별난 이야기, 색다른 시각”을 꼽기도 했다.

JTBC 드라마 'SKY 캐슬'. 제이콘텐트리 제공

JTBC 드라마 'SKY 캐슬'. 제이콘텐트리 제공


K스토리에 ‘K’가 있을까, 없을까...문화적 혼종성의 힘

한국적인 것이 K스토리의 인기 비결일까, 아니면 한국 고유의 색채를 지우고 무국적 콘텐츠로 만들어서 세계적 인기를 끌게 된 걸까. 이율배반적일 수 있지만 둘 다 답일 수 있다. K팝이 영미권 팝과 힙합, 일본의 아이돌 시스템에 한국적 색채를 가미해 세계적 성공을 거뒀듯 K컬처는 여러 국적의 콘텐츠를 혼합해 전 세계를 공략했다.

한인 2세인 마이클 김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미국 공영방송 NPR의 팟캐스트 ‘한국 문화는 어떻게 세계적이게 됐나’에 출연해 “한국 문화 상품이 이렇게 인기 있고 성공적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그다지 한국적이지 않아서인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K팝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은 해외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 한국인들은 그런 영향의 다양한 부분을 통달한 뒤 한국식으로 재포장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오징어 게임’은 일본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 일본 영화 ‘배틀로얄’,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 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적 정서와 사회·경제적 문제를 가미하며 한국적인 드라마가 됐다.

이런 문화적 혼종성(cultural hybridity)은 스토리텔링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드러난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여러 장르와 주제가 뒤섞인 스토리텔링 방식이 K스토리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고프먼 대표는 "K스토리는 코미디와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를 뒤섞기 때문에 도드라져 보인다"며 “희극과 비극, 당황스러운 일과 바보 같은 일이 하루에 모두 일어날 수 있듯 여러 장르가 뒤섞인 것이 실제 삶과 더 가까울 수 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넷플릭스 제공


희노애락 K스토리, 신파도 통했다

K스토리의 'K스러움'을 가족극, 로맨스 등을 포함한 멜로드라마적 화법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애플TV플러스 시리즈 '파친코'의 각본을 쓰고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한국계 미국인 제작자 수 휴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의 스토리텔링 전통에는 멜로드라마의 언어가 내재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서구권에서 멜로드라마는 오랫동안 무시돼 왔지만 잘 만들어질 경우 언어와 국경, 세대 등을 초월한다"며 "요즘 시청자들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갈망하는데 K스토리가 그런 걸 해소해준다"고 말했다.

멜로드라마적 요소는 종종 지나친 감정 과잉의 '신파'로 인식돼 평가절하돼 왔다. 하지만 할리우드 산업이 폭력과 볼거리에 치중하다 정서적 체험을 고갈시킨 탓에 K스토리의 강렬한 희노애락이 시청자들의 갈증을 채우게 됐다는 것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도 '오징어 게임'을 분석하면서 "액션과 장식을 빼고 보면 완전히 전통적인 형제애와 자매애를 그린 멜로드라마"라고 했다. '휴먼 드라마'라는 K드라마 특유의 장르를 만든 인간애와 측은지심은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앤더슨 교수도 "시청자들은 한국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약자 캐릭터를 응원하는 걸 좋아한다"며 "한국 드라마의 '나쁜 남자' 캐릭터도 종종 성격이 바뀌어 결국엔 착한 면모를 드러내곤 한다"고 말했다.


'옷소매 붉은 끝동' 보며 정조 검색하는 시청자들

지극히 한국적이라 생각하는 사극 드라마가 최근 아시아에 이어 미국 시청자들까지 조금씩 사로잡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국 고유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익숙한 화법으로 보편적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통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LA 케이콘에서 만난 케이틀린(29)씨는 가장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 중 하나로 ‘인현왕후의 남자’(2012)를 꼽으며 “미국 역사에는 우리가 미국인인 것을 말해주면서 판타지에 빠져들게 만드는 뭔가가 없다"면서 "그렇기에 한국의 매력적이고 풍성한 역사를 알게 되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옷소매 붉은 끝동'. MBC 제공

'옷소매 붉은 끝동'. MBC 제공

울퉁불퉁 굴곡진 한국의 역사는 K스토리의 좋은 소재다. 시청자들은 사극의 대서사시와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즐기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국·베트남계 미국인인 30대 민디, 미나 자매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주몽’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관련된 한국 왕이나 역사를 검색해본다”며 “한국 사극은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고 남자 배우가 잘생겨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주인공 캐릭터의 배경이나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인물 등을 자세히 다뤄 재미있다"고 말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K스토리는 이야기 고갈에 시달리는 할리우드의 가장 파워풀한 대안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날로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고프먼 대표는 “’기생충’ ‘오징어 게임’ ‘우영우’ ‘파친코’ 같은 작품은 연출, 연기, 시청률(관객수) 등에서 최고 수준이다"며 "K스토리의 인기는 계속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LA)=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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