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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저 언덕에 한국 고대문명의 수수께끼가 담겨 있다

입력
2021.06.19 11: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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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동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5> 부여 송국리 청동기 유적


돌상자 무덤 속 청동검, 요하와 연결되는 문화를 보여주다

'황해유역의 중국 청동기 문화와 크게 대립하는 만주-한국의 청동기 문화지대를 설정해야 될 것 같다.’

거의 반세기 전인 1974년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한국 출토 요녕식(遼寧式) 동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고 김원용 선생의 결론이다. 경상도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었음직한 청동검에 대한 발표였다. 그런데 바로 그 해 4월 19일 충남 부여군 송국리 유적에서 몇 장의 네모난 판석으로 만들어진 상자 모양의 무덤 속에서 한반도 최초로 요녕식 동검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예견이 맞아 들어간 셈이었고, 오늘날 우리 역사·고고학자들이 '요하문명도 자기 것'이라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코웃음을 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요녕식 동검의 분포 덕분이다.

1974년 발견된 제1호 석관묘의 개석 제거 후 유물이 배치된 상태(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출토된 유물들로 가장 왼쪽이 비파 형태의 요녕식 동검이다.

1974년 발견된 제1호 석관묘의 개석 제거 후 유물이 배치된 상태(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출토된 유물들로 가장 왼쪽이 비파 형태의 요녕식 동검이다.

왜냐하면 요하(遼河·오늘날 랴오허강) 일대에는 중국의 청동기와는 다른 소위 '스키토-시베리아' 계통의 요녕식 동검과 기하문거울을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가 출현한다.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문화의 원형이며 이후 한반도로 이어지고 진화하여 '세형 동검' 또는 '한국식 동검' 문화가 된다. 요녕식 동검이나 세형 동검 모두 중국식 검과는 달리 칼날과 손잡이를 별도로 만들어 부착하는 기술적 특성이 있다.

요녕식 동검은 고조선과 연관된 집단들의 가장 오래된 금속기 문화를 상징하는 칼이다. 일제강점기 학자들은 만주지역에서만 발견된다고 하여 ‘만주식 동검’으로 불렀지만 현재 그 기원지라고 짐작되는 지명을 딴 ‘요녕식 동검' 또는 세상의 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인 ‘비파형(琵琶形) 동검’으로 불린다. 비파형은 칼날이 곡선이어서 청동기 시대 검으로서는 대단히 특징적인 모양이다. 세상을 많이 돌아다니며 보았지만 이 시대의 검 가운데 유사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한반도 고대문명의 터, 소나무와 국화의 동네(松菊里)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이제는 세계유산이 된 백제의 고도다. 부여에서 차를 타고 금동용봉향로가 발굴된 능산리 백제고분지역을 지나 논산 방면으로 난 국도를 따라 간다. 15분 정도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 보면 나무로 만든 건축구조물에 걸린 '부여송국리유적' 간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관람객을 위한 주차장이 넓게 마련되어 있다. 유적의 입구라고 표시된 곳에서 얕은 능선이 이어지는 좁은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1974년 발견되어 반세기 동안 발굴되어 온 송국리 유적 구역이 등장한다. 이곳이 최초로 발견됐을 때에는 ‘한국 선사고고학 최대의 발견’ ’한반도 청동기 문화 실체 확인‘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유적지 능선의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낮은 구릉성 산지가 물결처럼 지평선으로 이어져 있고 깊지 않은 골짜기 아래에는 모내기를 갓 끝낸 유월의 논이 기울어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부여 송국리 유적 상공에서 북쪽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부여 송국리 유적 상공에서 북쪽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한반도 최대의 청동기 문명 유적이라고 하지만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서해안 지역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낮은 자연구릉처럼 보일 것이다. 지명(松菊里)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유적이 위치한 능선의 사면에 멋지게 자라난 붉은색 몸통의 소나무들과 능선을 따라 닦인 경운기 도로 옆에 늘어선 국화모양 꽃잎의 개망초꽃들이 그나마 볼거리로 생각될 정도이다. 그러나 그 땅 속에는 한국 고대 청동기 문명의 비밀들이 숨어 있다. 수십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한반도 요녕식 동검처럼 중요한 고고학적인 사실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도 많이 남아 있다. 어쩌면 이 유적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마다 새로운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국리 유적에 보이는 한국 고대문명의 모습

기원전 9~8세기경 시작된 이 유적이 발견된 이후 발굴과 해석의 과정에서 한반도 고대문명의 실체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고대문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유적에서 문자를 제외한 문명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녕식 동검으로 대표되는 금속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기술의 산증거이다. 또 성채 도시로 볼 수 있는 마을 구조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무덤 양식이 나타나며 능선의 남쪽 끝에 위치한 산직리에 거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고인돌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자가 없었다뿐이지 소위 군장(君長)사회로 불리는 복합사회, 즉 계층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살았던 증거들이 명확하게 보인다.

14~15차 발굴에서 드러난 목책열. 능선의 중심부를 따라 이어진다. 시대가 늦은 주거지들을 파괴하는 모양에서 송국리 유적이 그만큼 오랫동안 사용됐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14~15차 발굴에서 드러난 목책열. 능선의 중심부를 따라 이어진다. 시대가 늦은 주거지들을 파괴하는 모양에서 송국리 유적이 그만큼 오랫동안 사용됐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1990년대 조사에서 능선을 감싼 목책열의 길이가 2.5㎞가량이고 내부 공간이 61㏊ 규모라는 점이 확인됐다. 2000년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가 실시한 발굴에서 능선 정상부의 경운기 길을 따라 발견된 두 줄의 나무기둥 자리는 현재까지 170여m 확인됐는데, 추후 발굴에 따라서는 능선 전 구간으로 이어질 듯하다. 나무기둥열을 이어가기 위해 지형을 보강했던 흔적은 사전 계획하에 토목작업으로 마을의 공간구조를 실현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쪽 능선에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나무기둥 자리는 당시에 이곳에 큰 집이 있었고 이 유적이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불에 탄 벼를 포함해 이제까지의 발굴에서 드러난 유적을 통해 이 사회는 쌀농사를 생업 기반으로 삼고 전문 장인집단이 금속기, 석기, 토기를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유적 가운데 이렇게 다양한 요소의 고대문명 양상을 볼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송국리 유적은 우리 고대사회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를 반영하듯 1976년 능선 일대 55만㎡ 면적이 국가사적 249호로 지정됐고 그간 4개 기관이 22차례에 걸쳐 발굴을 실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송국리 문명의 전모를 파악하기는커녕 범위를 밝히는 것조차 요원하다.

12~13차 발굴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는 중심 능선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에 위치해 있다. 잔디 위로도 기둥열 표시가 보인다.

12~13차 발굴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는 중심 능선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에 위치해 있다. 잔디 위로도 기둥열 표시가 보인다.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

요녕식 동검이 송국리 유적에서 발굴된 이후 같은 지역인 연화리, 예산의 동서리, 부여의 합송리, 천안의 청당동 등 충남지역 유적에서 송국리보다도 후대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잘 만들어진 청동기들이 발견됐다. 이 일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중요한 청동기들이 이번에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도 포함돼 있다. 역사기록은 아직 없지만 송국리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대단히 발달한 한국 청동기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문명의 주인공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 고대사회의 형성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게 답하기 어렵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유물의 한반도 문명 형성 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해 논쟁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다.

충남지역에서 발견되는 검파형(칼자루 모양) 청동기는 최고의 기술을 보여준다. 사진은 송국리에서 이어지는 시기의 예산 동서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하문 장식과 손모양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충남지역에서 발견되는 검파형(칼자루 모양) 청동기는 최고의 기술을 보여준다. 사진은 송국리에서 이어지는 시기의 예산 동서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하문 장식과 손모양이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한 의문이 청동기의 존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송국리 문화는 '송국리 토기'나 '송국리형 집자리'로 대표된다. 어쩌면 이들은 동검보다 훨씬 고유한 문화 특성을 보여준다. 먼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토기 가운데 가장 늘씬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살짝 외반되어 날카로울 정도로 꼼꼼하게 마감된 토기의 입술이 매력적이다. 이 토기는 북으로는 한강을 넘지 못했지만 남쪽으로는 제주도까지 나타나고, 또 논농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규슈를 포함하는 서일본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당시 송국리형 문화가 한반도 남부지역에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이북과 경북 내륙지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은 의문이다.

25차 발굴에서 확인된 원형 집자리. 장방형의 작은 구덩이들은 조선시대의 민묘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원형 집자리와 방형 집자리가 복원된 유적 광장으로 오른쪽 길은 능선을 따라 나 있는 농로다.

25차 발굴에서 확인된 원형 집자리. 장방형의 작은 구덩이들은 조선시대의 민묘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원형 집자리와 방형 집자리가 복원된 유적 광장으로 오른쪽 길은 능선을 따라 나 있는 농로다.

송국리형 집자리 역시 대단히 특징적이다. 바로 원형의 움집이다. 중심에 깊게 판 원형 또는 타원형의 구덩이가 있고 그 주위에 두 개의 기둥이 배치된 구조다. 중심구덩이를 왜 만들었는지, 그 목적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이 집자리들이 방형 또는 장방형 집자리와는 다른 집단의 것인지, 시기적으로 양식이 변화해서 나타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유적이 위치한 능선의 남쪽 끝에 자리한 산직리 고인돌. 괴임돌이 내려앉았다.

유적이 위치한 능선의 남쪽 끝에 자리한 산직리 고인돌. 괴임돌이 내려앉았다.

고인돌 외에 옹관묘, 석관묘, 토광묘 등 다양한 무덤 양식이 존재하는 것이 어떤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무덤은 집단의 대단히 보수적인 전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방계 장제(葬制)문화라 할 수 있는 옹관묘와 북방계 요녕식 동검이 담긴 석관묘가 섞여서 나타나는 것은 이처럼 상반된 문화의 문화복합 과정이 어쩌면 한반도 문명 형성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남방계 해양문화와 동북아를 관통하는 대륙문화의 융합 패턴이 고대문명의 형성에서도 일어난 것은 아닐까? 송국리 유적에 보이는 남방계 문화는 옹관만이 아니다. 쌀농사가 그렇고, 유구석부나 유견석부의 존재도 남방계 쌀농사와 목공(木工)문화의 흐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고대문명의 발전과정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바로 이 유적 속에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왼쪽부터 송국리에서 출토된 마제석검, 토기, 홍도. 마제석검은 돌의 결을 이용해 문양을 만들어 강한 느낌을 준다. 송국리형 토기는 바닥에 구멍을 뚫어 옹관으로 사용했다. 홍도는 적색산화철로 마연한 항아리다.

왼쪽부터 송국리에서 출토된 마제석검, 토기, 홍도. 마제석검은 돌의 결을 이용해 문양을 만들어 강한 느낌을 준다. 송국리형 토기는 바닥에 구멍을 뚫어 옹관으로 사용했다. 홍도는 적색산화철로 마연한 항아리다.


언덕 위 풍요로운 마을 사람들을 상상한다

송국리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면 만든 사람의 손이 보이는 듯하다. 현장에는 아직도 전시관이 없지만 부여박물관 별도의 방에 전시된 청동기, 옥 장신구, 토기와 석기들을 보면 그 정교한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선사유물은 흔히 원시적이라거나 투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금속기 못지않게 멋진 마제석검들을 보면 돌의 결이 보여주는 문양은 가히 예술의 경지이다. 도차를 사용하지 않고도 얇게 빚어 올린 구릿빛 송국리 토기의 조형미, 표면이 마연돼 어린아이의 고운 피부 같은 홍도에 나타난 정성을 보면 수천 년을 넘어 인간의 손길과 마음씨를 느낄 수 있다. 고대 마을이 있었던 언덕에서 유월 한낮의 태양에 빛나는 물이 가득찬 논을 내려다보며 송국리 사람들의 흐뭇한 표정을 상상한다. 다른 지역 고대문명 유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미 가득한 한국 문명유적 여행의 맛이다.

집자리 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본 응평천 주변의 모내기가 끝난 논.

집자리 복원 광장에서 내려다본 응평천 주변의 모내기가 끝난 논.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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