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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칼에 상처 입은 삶, 검도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입력
2021.03.19 09: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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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2>제심관 관장 오병철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돼 20년 옥살이
“출소하니 천지개벽, 그대로인 건 검도뿐”
25년 운영한 검도장 ‘제심관’ 접는 소회

‘통혁당 사건’ 장기수 출신으로 30년간 검도와 함께해온 오병철 관장을 1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제심관에서 만났다. 목판은 그가 쓴 서예로 만든 작품이다. 서재훈 기자

‘통혁당 사건’ 장기수 출신으로 30년간 검도와 함께해온 오병철 관장을 1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제심관에서 만났다. 목판은 그가 쓴 서예로 만든 작품이다. 서재훈 기자

18년 만의 독보(獨步)는 일주일 만에 끝났다. 혼자 걸을 권리가 없는 수형자에게 귀휴(재소자가 특정 사유로 휴가를 얻는 일)는 곧 독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제한된 자유의 시간을 마치고 마주 선 전북 전주교도소 앞, 아내는 그만 와락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국가보안법에 반공법(1980년 폐지) 위반, 형법상 간첩방조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가 교도소로 호송될 때도 냉정을 잃지 않던 아내였는데. 옥중의 그를 대신해, 딸 양육과 양친 생계까지 흔들림 없이 도맡던 아내가 처음 무너진 순간이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대구 남자인 그도 교도소 철문이 닫히자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1986년 11월의 일이다. 2년 뒤 자유의 몸이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의 무기수 출신 오병철(84) 제심관 관장이다. 아내는 동화작가이자, 햇빛출판사를 만든 윤일숙(82) 대표. 통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중정·국가정보원 전신)가 발표한 대표적 공안 사건이다. 오 관장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고문을 당하며 조사받을 때 ‘통혁당’이란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당시 중정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공작금 12만 원(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4,000원 안팎)을 수수한 ‘통혁당 교양책’이었다.

6ㆍ29 선언 1주년을 기해 이뤄진 양심수 대사면으로 가석방된 뒤 그는 죽도(竹刀)와 함께 살았다. 1991년 처음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제검관이라는 수련장을 열었고, 5년 뒤엔 마포구 공덕동으로 터를 옮겼다. 제심관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게 그때다.

25년을 한자리에서 검도인의 사랑방을 자처해온 이곳이 이달 20일 문을 닫는다. 주택재개발 사업에 따른 불가피한 결정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한 검도는 오 관장에게 운동 이상의 의미다. 20년 복역 생활을 마치고 맞닥뜨린 세상에서 가족 빼고 그대로인 건 검도뿐이었다. 버스는 ‘토큰(교통카드 이전에 쓰인 동전 모양의 승차권)’이란 게 생겼고, 간판엔 영어도 모자라 프랑스어에 독일어까지 판쳤다. 컴퓨터라는 신문물이 등장했고, 자동차는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선 어디 나다니기도 겁날 정도로 세상은 변해버렸다.

“20년 만에 죽도를 잡았는데 몸이 기억을 하더군요. 마치 알아서 재생하듯 첫날부터 날아다녔죠.”

검도는 그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졌다. “어떻게 보면 나를 향해 (정권의) 칼과 주먹이 날아온 거였잖아요. 왜 분노가 없겠어요. 억압된 응어리도 있었겠죠. 그런데 나는 그들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검도라는 다른 방법으로 해소를 한 거예요.”

수련장 정리를 아흐레 앞둔 11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한 제심관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검도는 곧 자유”라고 그는 말했다.

◇제심관 터, 65년 전 검도 수련했던 곳

그는 검도를 고교 시절인 1954년 처음 시작했다. 그가 제심관에서 호면을 써보고 있다. 서재훈 기자

그는 검도를 고교 시절인 1954년 처음 시작했다. 그가 제심관에서 호면을 써보고 있다. 서재훈 기자


-한 자리에서 25년을 지킨 수련장을 당분간 접게 되셨네요.

“이사는 1996년 12월에 했는데, 세무서에 영업 등록한 날짜를 보니 1997년 3월 15일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거쳐간 수련생들이 제법 많죠. 문 닫기 전에 합동연무를 하기로 했어요. 재개발 때문에 건물이 헐리게 되긴 했지만, 휴업 상태로 두려고요. 검도장을 하는 제자 중 주말에 수련장을 빌려주겠다는 이가 있어서 올 수 있는 사람들과 한 번씩 검도는 하려고 해요.”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그렇죠. 이 도장이 단순히 무도로 돈을 버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거든요.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대학 다니던 1950년대에도 여기서 수련을 했어요.”

-어떻게요?

“그때는 서부지법 자리가 경성감옥이었어요. 독립투사들 잡아다가 고문하던 혹독한 곳이었죠. 이 주변은 재소자들이 노역을 하던 국유지 논밭이었고요. 여기에 교도관이나 경찰이 와서 수련을 하도록 만든 검도장이 있었거든요. 그 시절엔 수련할 수 있는 개인 도장이 없었으니 나도 여기 와서 검도를 하곤 했죠.”

그는 서울대 철학과 56학번이다. 경북고 재학시절 검도를 하기 시작해 대학에 들어가서 검도부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체전에 출전해 대학부 우승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 자신도 최우수 선수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 검도로 따지면, 65년이나 인연이 있는 곳이네요.

“나한테는 그런 추억과 역사가 깃든 자리죠.”

-수험생 시절에 검도에 빠진 이유가 궁금해요.

“경남 합천 촌놈이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유학을 갔어요. 고모댁이 있었거든요. 우등생이 되니까 상류가 되더군요. 하하. 경북고도 수석으로 들어갔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내가 싯다르타라도 된 것처럼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만 해도 부랑자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대개 나병 환자들이죠. 그들이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니면서 부르던 게 ‘품바’예요. 그 각설이 타령에 그렇게 한이 맺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저렇게 고통스럽고, 배고픈 인간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같은 고민을 한 거죠. 한국전쟁 직후이다 보니 전후 문학이나 사르트르, 카뮈의 실존주의 사상에도 빠졌고요. 그대로 가다가는 병이 들 거 같더라고. 그래서 탈출구로 시작한 게 검도예요. 공부는 뭐, 머리 싸매고 하진 않았죠.”

-검도를 하니 뭐가 좋던가요?

“정신이 맑아져요. 정서적으로 평화로워지는 거죠. 원래의 자기,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그러니 나와 잘 맞았어요.”

-검도나 철학에 빠져서 공부는 거의 손을 놨다고 하셨지만, 서울대에 입학했어요.

“1년 쉬고 들어간 데다 대학을 9년이나 다녔어요. 그새 집이 망해서 등록금을 벌어야 했거든요. 중간에 군대도 다녀왔고요.”

◇돌쟁이 딸 두고 감옥으로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부터 졸업 후까지 그는 세 차례나 연행됐다. 딸의 돌잔치를 마치고 세 번째로 잡혀 들어갔을 때는 무기징역형으로 이어졌다. 서재훈 기자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부터 졸업 후까지 그는 세 차례나 연행됐다. 딸의 돌잔치를 마치고 세 번째로 잡혀 들어갔을 때는 무기징역형으로 이어졌다. 서재훈 기자


-대학 다니는 동안 고초도 여러 번 겪으셨죠.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에는 학생 지도자라고 엮여서 잡혀갔죠. 서울대 학생들이 (1960년) 4ㆍ19혁명 이후에 민족통일연맹을 조직했는데 (학생회) 대의원을 지냈다고 나까지 잡아간 거죠. 1964년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 배후 조직을 찾는다면서 학적을 갖고 있는 학생은 대부분 연행해 조사했고요.”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건 아닌가 봐요.

“늘 중심부 근처에 있다가 끼어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하하. 어쨌든 당시에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으니까요. 고교 시절부터 정치적 구호가 아닌, 사회 정의에는 늘 관심이 많았고요. 주된 산업 기반이었던 농촌 구조 개혁 운동도 했죠.”

1964년 당시 중정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두고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인민혁명당)의 배후 조종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고문을 동원해 조작한 거였다. 당시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이 급기야 기소를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밀어붙이다 결국 당시 피고인 26명 중 14명의 공소가 취소됐다. 그도 그중 하나다.

더 거센 폭풍은 4년 뒤에 찾아왔다. 이번엔 통혁당 사건에 연루된 거였다. 딸이 돌을 막 넘긴 무렵이었다. 백과사전은 통혁당을 “북한 노동당의 실질적인 재남지하당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조사받을 때 ‘통혁당’이란 조직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요.

“그 시절엔 대부분 그랬죠. 조사받을 때 ‘가칭’ 뭐라고 하면서 들이대니까. 공소 내용이 확정 판결까지 유지됐어요. 무기징역 선고도 그대로 갔죠. 그럼 사람이 자연스럽게 포기를 하게 돼요.”

-수감되자마자 전향서를 썼다고 들었어요.

“대전교도소로 갔는데 정치범이라고 특별사로 보내더라고요. 가족 면회도 제한되고, 편지가 아닌 엽서만 가능하죠. 공장 출역(수용자가 작업장에 일하러 가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일단 특별사를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향서를 쓰면 일반사로 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쓴 거예요.”

-그럼, 어디서 어디로 전향을 하신 건가요.

“그게 참 우스운 거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의 기를 꺾기 위해 일본놈들이 만든 게 전향서인데. 아무튼 정권이 나를 규정해 놓기를 ‘좌익’이니, ‘공산주의자’라고 해놨으니까. 나는 늘 나인데 말이죠. 전향서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조사받을 때도 그랬어요. 고문까지 해 가면서 극단적으로 (강압 조사를) 하니까 어느 순간엔 ‘너희 마음대로 해라’ 하게 돼요. 하라는 대로 다 인정하는 거죠. 계속 얻어 맞다가 잘못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속으로는 ‘너희가 뭐라고 하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했죠.”

-옥중에서 자포자기의 순간은 없었나요.

“처음엔 하루가 굉장히 지루했어요. 그런데 좀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 밥 받고 저녁 점호할 때까지요.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하루가 짧아지죠.”

-수감 생활 중 가장 힘든 건 뭐였나요.

“그 안에도 빈부의 차가 있다는 거였어요. 나는 그래도 가족이 매달 영치금도 넣어주고 편지나 책도 보내주고 접견도 왔죠.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 안에서 하는 말로 ‘범털’도 있고, ‘개털’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가진 걸 공유하거나 나누질 못해요. 예를 들면, 목공장에서 일하고 나면 정말 배가 고프거든요. 다 똑같죠. 나는 달걀 하나라도 사 먹을 수 있는데 그걸 못 먹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그런 사람을 놔두고 나만 먹는 게 고통스럽더라고요. 신문 기사만 보면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범죄자도 그 안에서 만나보면 다 인간이거든요.”

의외였다. 철학적인 고민이었기에. 신영복 교수는 “옆 사람을 단지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하는 여름 징역은 사람을 증오하게 만든다”고 고백했지 않은가.

-그 안에서도 인간의 실존 문제에 생각이 미쳤던 거군요.

“물론 행동의 제약 같은 것도 힘들었죠. 재소자는 독보권이 없어요. 혼자 걸을 권리가 없는 거죠. 어디를 가든 허락을 받아야 하고, 허락을 받아도 교도관이 동행을 해요.”

◇”난 김일성이다” 외쳐도 사상범 몰던 시절

글을 배운 유치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딸은 꾸준히 옥중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출판사를 하던 아내는 그의 출소 후 딸의 편지들을 모아 ‘창살가의 햇빛’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김지은 기자

글을 배운 유치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딸은 꾸준히 옥중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출판사를 하던 아내는 그의 출소 후 딸의 편지들을 모아 ‘창살가의 햇빛’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김지은 기자


-시절이 군부 독재정권 치하였으니 별의별 죄목으로 잡혀온 사람도 많았겠죠.

“감옥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머리칼이 다 세어버린 사람도 있어요. 하도 분하니까. 스스로 그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거죠.”

-기억나는 사람이 있나요.

“구치소에 있을 때 옆방에 사람이 한 명 새로 들어왔는데 죽는 소리를 해요. 교도관 눈을 피해 소리를 질러서 ‘어떻게 오게 됐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택시 운전사더라고요. 광화문에서 단속에 걸렸는데 경찰이 뇌물을 달라고 한 거죠. 그때만 해도 그러던 시절이에요. 돈을 쥐여주고는 다시 운전해 가면서 혼잣말로 ‘에이, 전쟁이 일어나서 세상이 뒤집혀야 저런 놈들이 없어지지’ 했는데, 뒤에 타고 있던 승객이 하필 형사였던 거죠. 그 형사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넣은 거예요. 정치범은 빨간 딱지를 붙였는데 그걸 달고 들어온 중1 학생도 있었죠. 친구끼리 싸우다가 상대가 ‘난 임꺽정이다’ 하니까 ‘나는 그럼 김일성이다’ 했다는 게 죄목이에요. 심지어 교사가 고발을 했다더군요.”

기막힌 시절이다. 그러니 저잣거리에서 막걸리 마시다 한 소리에도 구속된다고 ‘막걸리 반공법’, ‘막걸리 (국가)보안법’이라는 말도 있었다.

-부인과 딸이 꾸준히 면회를 갔다고 들었어요.

“네, 편지도 꼬박꼬박 보내줬고요. 그래서 내가 안에서 좀 유명했죠. 하하. 딸한테 편지가 오면 교무과 직원부터 정치범들까지 다 함께 읽을 정도였어요.”

-검도는 못하셨지요.

“그렇죠. 그런데 대전교도소에 갔더니 내가 검도를 한 걸 알고 교도관들이 전국대회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좀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도를 한 적이 있는데, 그 팀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대접’ 좀 받았죠. 하하.”

-어떤 대접이었나요?

“겨울이 되면 그 전해에 재소자들이 입었던 솜옷을 무작위로 나눠 주거든요. 그러니까 솜이 다 터져서 나온 옷, 크기가 안 맞는 옷… 뭐 난리죠. 그러면 그걸 다 해체해서 솜을 고르게 넣어놓고는 다시 누벼서 입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솜옷을 나눠줄 때 그해에 온 새 옷을 준다든지 하는 혜택이죠. 하하.”

◇신영복과 몰래 읽던 신문

그의 또 다른 취미는 서예다.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74년 처음 붓을 잡았다. 그의 뒤편으로 붓걸이, 문진, 벼루 같은 서예도구들이 보인다. 서재훈 기자

그의 또 다른 취미는 서예다.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74년 처음 붓을 잡았다. 그의 뒤편으로 붓걸이, 문진, 벼루 같은 서예도구들이 보인다. 서재훈 기자


-서예도 옥중에서 배우셨다고요.

“전주교도소로 이감됐을 때 서예방에 들어갔어요. 우량수 방에는 신문을 넣어준다는데 그중에 서예방이 있었거든요. 물론 지난 신문이지만. 신문을 보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나중엔 서예를 참 좋아하게 됐죠. 전주가 예술의 고장이잖아요. 그래서 강암 송성용, 남정 최정균, 여산 권갑석 선생 같은 분들이 와서 글씨도 봐 주셨죠. 화선지가 너무 비싸니까 인쇄 공장에서 나온 파지나, 새까매진 종이에다 (붓에 물만 묻혀) ‘물글씨’를 써서 연습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게 해 봤자 전혀 글씨가 늘지 않더라고요. 하하.”

1974년 옥에서 처음 붓을 잡았으니 그래도 석방될 때까지 14년을 꾸준히 한 셈이다. 시민단체 인권운동사랑방의 로고가 그의 작품이다.

오 관장의 글씨로 만든 시민단체 인권운동사랑방 로고.

오 관장의 글씨로 만든 시민단체 인권운동사랑방 로고.

-신영복 선생은 언제 만나셨나요.

“형 확정되고 대전교도소로 내려갔는데 몇 달 후에 (대학 3년 후배인) 신영복씨가 왔죠. 1, 2년 대전에 함께 있다가 나중에 전주교도소에서 다시 만났어요. 신영복씨가 구두 수리하는 데서 일을 했거든요. 나는 그 근처 칠공장에서 일했고요. 그때는 대개 교도관들이 구두를 신문지에 싸서 수리하러 왔거든요. 그 신문지를 숨겨서 방에 갖고 와서는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화장실에서 몰래 읽느라 애를 썼죠. 하하.”

-무기징역으로 기약이 없을 것 같던 수감 생활이 1988년 끝이 났죠. 사면 소식을 듣고 어떠셨나요.

“6ㆍ29선언 1주년을 기해서 가석방을 한 건데 그 전에 좀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죠. 바깥 세계와 분리돼 있지만, 교도소도 정세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이거든요. 사회가 경직되면 더 엄격해지고, 민주화되면 좀더 자유로워지죠.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세한 변화는 느끼고 있었어요. 밖에 있는 후배들이 (사면을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요. 그래도 사면의 기회가 나한테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20년 만에 사회로 나올 때 기쁘기만 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당시엔 정신이 없었어요. 석방날 기자들이 몰려오고 매스컴에서도 연일 난리였거든요. 신문이나 방송을 가급적 다 피했어요. 아직 신영복씨 같은 사람들은 안에 있었으니까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요. 서울로 올라와서 신영복씨 아버지부터 찾아가 인사했죠.”

신영복 선생도 그로부터 두 달 뒤 8ㆍ15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20년이나 지나 다시 마주한 세상은 어땠나요.

“그래도 안에서 신영복씨랑 ‘컴퓨터하고 자동차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더라’라면서 관련 책도 보고 그랬거든요. 나와서 보니 길거리 간판도 제대로 읽기가 힘들더군요. 외래어가 너무 많아져서요. 친구들의 대화도 한동안은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듣지를 못했죠.”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2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통째로 날렸는데요.

“인생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잖아요. 그때 안 끌려갔으면, 나중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엮여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을지도 모르죠. 실제 재건위 사건이 났을 때 ‘아차’ 했어요. 아주 좋은 친구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까. 생각해보면 살면서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인 1974년 중정이 조작한 공안 사건이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돼 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이라 불린다.

◇검도 수련은 자유를 얻는 과정

제심관은 이달 20일로 문을 닫지만, 그는 검도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했다. 수련장에서 그가 갑과 갑상을 챙겨 여미려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제심관은 이달 20일로 문을 닫지만, 그는 검도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했다. 수련장에서 그가 갑과 갑상을 챙겨 여미려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출소 후 힘들었던 건 뭔가요.

“가장 노릇을 못한 거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아내가 다른 일은 다 말렸는데, 검도장은 지원을 해주더군요.”

-죽도도 20년 만에 잡은 것일 텐데 어땠나요.

“우리 몸의 세포가 과거에 한 운동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처음 교도소에 들어갈 때는 정말 절망스러웠거든요. (고문 때문에) 다 망가진 몸을 끌고 갔으니까. 자동차에 빗대면 고물이 된 지경이었죠. 그런데 그 안에 있다보니 어느 새 재생이 되더라고요. 출소 후에 그래도 검도를 할 수 있겠나 싶었는데 해보니 되더군요.”

-검도의 의미가 남달랐겠네요.

“내가 사회로부터 엄청 두들겨 맞았잖아요. 주먹도 날아오고, 칼도 왔죠. 나는 똑같이 (폭력으로) 대응한 게 아니라 검도로 해소를 한 거예요. 하면 할수록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죠.”

-그래서 검도장 이름을 제심관이라고 지었나요.

“처음 신촌에 열었을 땐 제검관이었어요. 1991년만 해도 아직 군부정권이었으니까. ‘폭력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죠. 민주화가 되고 보니까 결국은 사람이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참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공덕으로 이전하면서는 제심관이라고 간판을 바꿔 달았죠.”

-죽도를 잡을 때 마음은 뭔가요.

“저는 평생을 했잖습니까. 뭐든 도가 트면 적은 힘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거든요. 이제는 죽도가 내 손의 일부 같아요. 그래서 자유로움을 느끼죠. 검도는 상대를 통해서 나를 알 수 있는 무예이기도 해요. 상대를 존중하는 게 곧 나를 존중하는 거죠. 나중에는 칼이 없어도 마음 자체가 칼이 돼요. 그건 정의의 칼이죠.”

그리곤 덧붙였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니까, 뭐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인간의 자유가 확장되는 쪽으로 진보해왔더라고요. 나는 검도 역시 자유를 획득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였죠.”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인간은 다 개별성이 있는 존재라는 거죠. 흑백 논리로 재단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그런데 점점 세상이 극단적인 원리주의로 사람을 판단하려 드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존재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면 좋겠어요.”

어쩌면 그것은 감옥에서 길어 올린 도일까. ‘희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쉽지 않았을 20년 옥살이. 그 시간을 견디면서도 존재의 의미를 놓지 않았기에, 그는 지금 실재하고 있을 테다.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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