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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더 중요한 것... 죽음을 더듬어 삶을 이야기하다

입력
2021.02.27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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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넷플릭스 '더 디그'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더 디그'는 영국 역사를 뒤흔든 서튼 후의 배 무덤 발굴 실화를 다룬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는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에게 자신의 땅에 있는 고분 발굴을 의뢰한다. 넷플릭스 제공

'더 디그'는 영국 역사를 뒤흔든 서튼 후의 배 무덤 발굴 실화를 다룬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는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에게 자신의 땅에 있는 고분 발굴을 의뢰한다. 넷플릭스 제공


'더 디그'를 봐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캐리 멀리건이다. 영국 런던 출신의 캐리 멀리건은 고전적인 매력의 배우다. 차분하면서도 내면의 열정이 어떻게 터져 나올지 모르는 사람. '이상한(crazy)'과 '기묘한(wierd)'이라는 단어를 잘 쓴다는 캐리 멀리건의 새 영화를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이미지일지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매번 감탄한다. 이것이야말로 캐리 멀리건의 매력이지, 라고. 매번 다른 모습인데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랐던 '언 에듀케이션(2009)'의 제니는 옥스퍼드 대학 합격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고교생이다. 보수적인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모범생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지금 이곳은 지루하기만 하다. 한순간 사랑에 빠지고, 세상의 이면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캐리 멀리건의 미래를 예감할 수 있는 역할이고, 영화였다.

2011년에는 두 편의 문제작에 나온다. 감각적 스타일을 과시하는 니컬러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와 '노예 12년'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스티브 맥퀸의 치명적 사랑을 그린 '셰임'. 이후 '위대한 개츠비', '인사이드 르윈', '서프러제트', '치욕의 대지' 등에 출연한 캐리 멀리건은 어떤 역을 연기하더라도 탁월한 변신을 보여주었다. 내면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흘러나오듯 자연스러웠고, 무엇이든 편해 보였다.


고전적인 매력의 배우 캐리 멀리건은 '더 디그'를 봐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넷플릭스 제공

고전적인 매력의 배우 캐리 멀리건은 '더 디그'를 봐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넷플릭스 제공


얼마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2018년 제작된 영국 드라마 '콜래트럴'의 캐리 멀리건을 만났다. 피자 배달부가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는 런던의 형사, 킵 글래스피. 사소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파고 들어가니 이민자와 인종 차별을 둘러싼 음모가 있었다. 유명한 높이뛰기 선수였던 글래스피는 부상을 당해 은퇴하게 된 경기의 영상을 가지고 다니며 보여준다. 창피한 기색은 전혀 없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며 상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언제나 침착하고, 생각이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형사물의 '고독한 늑대' 타입인가 싶지만 그렇지도 않다. 남편이 있고, 임신한 상태이고,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원만하다. 다만 주관이 뚜렷하고, 목적이 있으면 직진하는 타입이다. 평범해 보이면서도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글래스피는 캐리 멀리건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다.


'더 디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발굴 작업을 비추는 데 할애한다. 자신을 고고학자가 아닌 발굴가라고 칭하는 바질 브라운은 고등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실력만은 발군이다. 넷플릭스 제공

'더 디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발굴 작업을 비추는 데 할애한다. 자신을 고고학자가 아닌 발굴가라고 칭하는 바질 브라운은 고등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실력만은 발군이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더 디그'는 영국 동부의 '서튼 후' 유적지를 발굴하는 이야기다. 1939년 군인이었던 남편이 죽고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는 자신의 땅에 있는 고대 무덤을 발굴해달라고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에게 의뢰한다. 발굴된 '서튼 후'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로 판명되었다. 이전에는 바이킹 침공 이후의 유적들만 발견되었고, 대략 7세기의 앵글로 색슨 유적은 처음이었다. 발굴을 통해, 당시 잉글랜드에 외부 교역이 활발한 고대 왕국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서튼 후 유적지에서 발굴된 헬멧. 출처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서튼 후 유적지에서 발굴된 헬멧. 출처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서튼 후 유적지에서 발굴된 골드 벨트 버클. 출처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서튼 후 유적지에서 발굴된 골드 벨트 버클. 출처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바질 브라운은 자신이 고고학자(archeologist)가 아니라 '발굴가(excavator)'라고 굳이 정정한다. 바질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때부터 인근 유적들을 발굴하는 일을 했다. 고고학 지식과 발굴 실력은 고고학자를 능가하지만, 고고학자가 유적을 발굴할 때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서튼 후'에서 배 유물이 나오자, 대영박물관에서 고고학자 필립스가 와서 발굴을 지휘한다. 국가적인 발굴이기 때문이다. 이디스가 대영박물관에 모든 유물을 기증하여 전시했을 때, 처음에는 바질 브라운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 최근에야 바질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디스와 함께 대영박물관 전시에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둔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디스와 바질은 묵묵히 과거의 조각을 맞춰나간다. 넷플릭스 제공

2차 세계대전을 앞둔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디스와 바질은 묵묵히 과거의 조각을 맞춰나간다. 넷플릭스 제공


어릴 때부터 유적 등 과거의 것에 관심이 많았던 이디스는 바질을 믿고, 현장에서 밀려났을 때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디스는 '서튼 후' 유적 발굴이 끝난 후 몇 년 뒤 지병으로 사망한다. 어쩌면 이디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발굴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디스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쇠약한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결혼을 미루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다시 남편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

런던의 병원에 가던 이디스는 "우리가 1년 뒤에도 살아 있을 거라는 보장이 있어?"라며 키스하는 젊은 연인을 바라본다. 곧 전쟁이 시작된다. 청년은 전쟁에 나가고, 살아 돌아온다는 기약은 없다.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가는 길은 언제나 안타깝고 서글프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남긴다. 남긴 것을 보고, 그를 알지 못하는 먼 후대의 누군가 과거의 그를 상상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즐거워했을까.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워진다. 하나의 공간에서,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유적을 만나면, 물끄러미 유적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넘어 영원의 시간과 이어진다. 그 영원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유적을 찾고, 한참을 바라본다.


공군 입대를 앞둔 이디스의 조카 로리(왼쪽)와 고고학자 페기는 발굴 현장에서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넷플릭스 제공

공군 입대를 앞둔 이디스의 조카 로리(왼쪽)와 고고학자 페기는 발굴 현장에서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넷플릭스 제공


입대를 앞둔 이디스의 조카 로리는 발굴 현장의 사진을 찍는다. 유물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습도 찍는다. "왜 사진을 찍어요?" 고고학자 페기는 묻는다. "붙잡아 보려는 시도이죠. 금방 지나가니까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려는 거죠"라고 로리는 답한다. 열정적이며 쾌활한 페기는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남편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그저 시간을 견디던 페기는 로리를 만난 후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새로운 사랑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시간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서튼 후'의 무덤에는 배가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배가 발견되었다. 죽은 자가 타고 저승으로 가기 위한 배였다. 발굴이 끝나 유물을 정리한 후, 쇠약해진 이디스는 아들과 함께 배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들은 말한다. 배를 묻은 사람들의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거야. 이디스는 곧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다. 어른이 된 아들을 보지 못할 것이라 예감하고 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영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삶과 죽음, 영겁의 시간을 넘어 전해지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더 디그'는 죽음을 더듬어 삶을 이야기한다. 인류 보편의 역사와 개인의 서사가 담백하게 맞닿는다. 넷플릭스 제공

'더 디그'는 죽음을 더듬어 삶을 이야기한다. 인류 보편의 역사와 개인의 서사가 담백하게 맞닿는다. 넷플릭스 제공


'더 디그'는 시간의 영화다. 모두 죽고 부패한다는 이디스의 말에 바질은 답한다.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긴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됐어요. 그러니 정말로 죽는 게 아니죠." 그것은 우리가 유적과 유물,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된 무덤을 파는 그들을 누군가는 비웃을 것이다. 전쟁을 코앞에 두고 무슨 짓이냐고.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바질은 분명하게 말한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부수고 파괴하는 전쟁보다 과거의 우리를 되살리고 대화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과거를 통해 상상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니까.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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