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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취향] 淸 황실 겹사법랑의 화려함도 못 가린 ‘망국의 기운’

입력
2020.02.22 04:30
수정
2020.02.24 10:1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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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12> 고급 수입 공예품 ‘법랑 기물’

조선시대 창덕궁 후원 농수정 앞에서 찍은 고종의 사진. 고종이 서 있는 장대석 계단의 양 옆에 ‘겹사법랑 대형 향로’가 한 점씩 놓여 있다. 1884년 3월 촬영된 이 사진은 퍼시벌 로웰의 저서에 실려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창덕궁 후원 농수정 앞에서 찍은 고종의 사진. 고종이 서 있는 장대석 계단의 양 옆에 ‘겹사법랑 대형 향로’가 한 점씩 놓여 있다. 1884년 3월 촬영된 이 사진은 퍼시벌 로웰의 저서에 실려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884년 3월, 고종(재위 1863~1907)은 창덕궁 후원 안쪽에 위치한 농수정(濃繡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고종은 왕세자 이척(1874~1926)의 탄생 10주년을 기념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고종이 가장 먼저 찍은 사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은 조선 최초의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를 보좌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ㆍ1855~1916)이 촬영한 것으로, 그의 저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T THE MORNING CALM)’(초판 1885년)에 실려 있다. 고종은 곤룡포를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 채 정자 앞 장대석 계단 위에 서 있으며, 계단의 양옆에는 각각 커다란 향로가 놓여 있다.

똑 같은 장소에서 계단에 앉아 있는 포즈를 취한 왕세자(훗날 순종) 사진이다. 고종이 사진을 촬영했던 날에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돌계단의 좌우에 놓여 있는 ‘겹사법랑 대형 향로’ 한 쌍이 확인된다. Lowell Observatory Archives 제공
똑 같은 장소에서 계단에 앉아 있는 포즈를 취한 왕세자(훗날 순종) 사진이다. 고종이 사진을 촬영했던 날에 함께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돌계단의 좌우에 놓여 있는 ‘겹사법랑 대형 향로’ 한 쌍이 확인된다. Lowell Observatory Archives 제공

고종의 사진과 동일한 배경ㆍ장소에서 왕세자 훗날 순종(재위 1907~1910)이 되는 이척 또한 사진을 찍었다. 현재 이 사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종의 사진을 찍었던 로웰이 1884년 3월쯤 같은 날짜에 왕세자의 사진도 찍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세자의 사진에서는 대형 향로를 올려 둔 나무 탁자인 향궤(香几)가 잘리지 않고 나온 모습이 확인된다. 사진 속 향로는 당시 조선에서 제작된 기물이라기에는 매우 이색적이고 화려하여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와 유사한 향로를 중국 청나라 황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청나라의 첫 번째 수도였던 ‘심양 고궁’(瀋陽 故宮)의 숭정전(崇政殿)에 놓여 있는 대형 향로이다.

중국 동북부 요녕성 ‘심양 고궁’에 세워진 숭정전(1636년 완공)의 내부 전경. 전당의 계단 양 옆으로 ‘겹사법랑 대형 향로’ 가 놓여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중국 동북부 요녕성 ‘심양 고궁’에 세워진 숭정전(1636년 완공)의 내부 전경. 전당의 계단 양 옆으로 ‘겹사법랑 대형 향로’ 가 놓여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숭정전은 청나라 황제가 집무를 보거나 사신을 접견하는 등 황실의 공식적인 업무가 이루어졌던 정전(政殿)으로, 1644년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는 후대의 황제들이 제례를 올렸던 공간이기도 하다. 숭정전 내부 전당(殿堂)의 계단 양옆에 진열된 법랑 향로는 창덕궁 농수정 앞에 놓인 향로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향로를 올려 두는 향궤까지 모두 동일하게 한 쌍으로 구성된 예기(禮器)로서 궁궐 전각을 장식하는 중요한 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의 뚜껑과 몸체에는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남색을 띤 법랑유(琺瑯釉) 바탕에 꽃 넝쿨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 향로에 사용된 법랑(광물이 원료인 유약) 기술은 금속 표면 위에 가는 금속선을 문양의 윤곽선에 고정시킨 후, 석영ㆍ장석ㆍ붕사 등으로 만든 각양각색의 법랑유를 입혀 700~800도에서 구워 내는 기술로 ‘겹사법랑(掐絲琺瑯)’이라고 한다.

농수정 앞에 놓인 향로는 흑백 사진인 탓에 색상을 확인할 수 없지만, 세 다리에 장식된 짐승 얼굴문, 향로 전체에 빽빽하게 채워진 꽃 넝쿨문과 군데군데 그려진 뇌문(雷文) 등 전체적인 문양과 기형을 비롯한 여러 요소를 통해, 청 황실에서 애호하였던 겹사법랑 공예품 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청나라 황실의 겹사법랑 기물. 제작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청나라 황실의 겹사법랑 기물. 제작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청나라 황실의 겹사법랑 기물. 제작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청나라 황실의 겹사법랑 기물. 제작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청나라 법랑 공예는 제작 방법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뉘는데, 앞서 언급한 ‘겹사법랑’, 문양 윤곽선 이외의 여백을 쪼거나 움푹 파이게 조각하여 문양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하는 ‘참태법랑(鏨胎琺瑯ㆍ내전법랑이라고도 한다)’, 흰색 법랑유를 입힌 기면(器面) 위에 다양한 색의 법랑유로 문양을 그려 넣는 ‘화법랑(畵琺瑯)’ 등이다. 그리고 법랑의 바탕이 되는 재질인 태(胎)의 종류, 즉 금ㆍ동ㆍ자기ㆍ유리 등에 따라서도 세분화된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작품들은 법랑 금속기로서 ‘동태겹사법랑(銅胎掐絲琺瑯)’에 속한다.

법랑 기술은 청 황실의 독점 기술로서 난도가 상당히 높고 제작 과정이 복잡하여 오직 청 황실만을 위한 고급 공예장식 기술이었다. 법랑 기술은 본래 비잔틴ㆍ이슬람 제국 등에서 금속기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원나라 시대(1279~1368)에 중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태겹사법랑은 이후 명나라 경태년간(景泰年間ㆍ1450~1456)에 매우 정교하게 발전하여 ‘경태람(景泰藍)’이라는 속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청나라 법랑 기물은 특히 강희제(재위 1662~1722)ㆍ옹정제(재위 1723~1735)ㆍ건륭제(재위 1736~1795)의 열렬한 관심과 후원 속에서 제작되었고 금속태법랑과 자태법랑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고종과 왕세자의 사진 속 향로는 현재 실물로 파악되지 않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그와 유사한 ‘겹사법랑 대형 향로’ 한 쌍이 소장되어 있다. 두 점의 소장품은 창덕궁에서 이관된 궁중 전래품으로, 향로와 함께 향로 받침대가 일괄로 구성되어 있다. 두 점의 뚜껑 꼭대기에 구멍이 두 개씩 뚫려 있는 점을 볼 때, 원래 뚜껑의 손잡이가 있었으나 유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향로 전체에 넝쿨진 꽃 문양을 굉장히 섬세하고 빽빽하게 채워 넣었으며, 세 개의 다리마다 벽사를 뜻하는 괴수 얼굴과 발 모양을 도금 장식하였다.

이러한 문양 구성과 장식 기법은 1884년 사진 속 향로와 공통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청 18세기 중ㆍ후반경에 유행한 겹사법랑공예의 정교하고 번잡한 도안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향로는 언제 어떻게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19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창덕궁 농수정 앞에 놓여 있던 겹사법랑 향로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겹사법랑 향로는 어떠한 경로로 조선 궁궐에 유입될 수 있었을까? 두 쌍의 향로에 대한 정확한 유입 경위나 제작 시기 등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애초에 법랑 기물이 진상 또는 하사 때 외에는 청 황실에서 외부 유출이 금지되고 엄격하게 관리되었던 만큼, 조선 궁궐 내 법랑 기물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한해 공식적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법랑 기물이 조선으로 전해진 가장 이른 기록은 청나라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1723년(옹정원년)으로 알려져 있다. 1723년은 경종 3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기록에는 당시 옹정제가 조선 국왕에게 하사한 여러 물품 중 ‘어제법랑(禦製法瑯)’이라고 적힌 그릇 17점, 즉 완(碗ㆍ사발) 16점과 수호(水壺ㆍ물주전자) 1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다른 기록들에서 자기 재질의 법랑기 명칭은 ‘자(磁)’ 글자를 명기하여 따로 자기임을 밝히고 있으므로, ‘어제법랑’은 법랑 공예 중에서도 가장 먼저 고안되었던 금속 재질의 법랑기일 가능성이 크다. 1786년(건륭 51년)인 정조 10년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건륭제가 3차례에 걸쳐 자기 재질의 법랑 합(盒) 10점을 하사했다는 문헌 기록이 있다.

두 점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겹사법랑 대형 향로’(전체 높이 약 143㎝).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두 점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겹사법랑 대형 향로’(전체 높이 약 143㎝).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두 점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겹사법랑 대형 향로’(전체 높이 약 143㎝).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두 점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겹사법랑 대형 향로’(전체 높이 약 143㎝).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 법랑 기물을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경로는 청 황제의 하사를 통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청 황실에서처럼 궁궐의 실내에 진열하여 아름다운 장식 효과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1884년 사진 속 겹사법랑 향로 한 쌍은 원래 농수정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당시 고종과 왕세자의 사진 촬영 장소로 정해진 농수정을 꾸미기 위해 특별히 양탄자를 깔고 향로를 옮겨 와 임시로 배치했다고 판단된다. 평소에는 심양 고궁의 예와 같이 정전 등 주요 전각에 진설하였을 것이다. 흑백 사진 속 향로는 18~19세기에 청 황실을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궁중 전래 실물로 현존하지는 않지만 청 황제의 하사품으로 추정되는 법랑 자기 병(甁)들이 19세기 진찬의궤 도설에 등장하여, 연회나 의례 등에 활발하게 사용된 사실이 확인된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하는 청나라 법랑 기물 중에는 청 황제에 의한 직ㆍ간접 하사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있으며, 그 외에 19세기 후반 이후 민간으로 확산되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다수 있다. 민간 제작 상품의 경우에는 청나라로 파견된 사절단의 사행무역 또는 개인 구입 등을 통해 조선 왕실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청 황제 개인의 관심과 취향이 크게 작용하여 제작된 법랑 기물이, 18세기 이후 조선 왕실로 수용되어 왕실의 관리하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고, 대한제국기까지 왕실 가족들에게 애호되었다는 점이다.

임지윤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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