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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바꾼 법들] 하준이 앗아간 경사진 주차장…고임목 사용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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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바꾼 법들] 하준이 앗아간 경사진 주차장…고임목 사용은 ‘0건’

입력
2020.02.14 04:30
수정
2020.02.14 06:5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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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법 제정 이후 현실은 바뀌었나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7일 경기 과천 서울랜드 동문 주차장에 고임목 보관함이 설치돼 있었지만, 이를 사용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하준이가 주차장 경사로에서 미끄러진 차량에 치여 참변을 당한 후 하준이법이 마련됐지만, 홍보와 단속이 부족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과천=이한호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 7일 경기 과천 서울랜드 동문 주차장에 고임목 보관함이 설치돼 있었지만, 이를 사용한 차량은 한 대도 없었다. 하준이가 주차장 경사로에서 미끄러진 차량에 치여 참변을 당한 후 하준이법이 마련됐지만, 홍보와 단속이 부족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과천=이한호 기자

지난 7일 오후 찾은 경기 과천 서울랜드 동문 주차장. 하준이(당시 4세)가 2017년 10월 부모와 함께 놀이동산을 찾았다가 경사로에서 미끄러진 차에 치여 참변을 당한 곳이다.

이날 동문 주차장에 주차된 차량은 모두 21대. 이 가운데 고임목을 설치한 차량은 단 한대도 없었다. 고임목을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주차장 군데군데 고임목을 넣어둔 함이 있었지만, 1시간 동안 사용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2018년 2월 국회에서 통과돼 시행된 하준이법(개정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운전자는 경사진 곳에 주차할 때 고임목을 설치하거나 핸들을 길 가장자리로 돌려놓는 등 미끄럼 사고 발생을 막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곳에서 만난 운전자 4명 모두 미끄럼 방지 의무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다.

한국일보가 이용호 의원실을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하준이법이 시행된 2018년 9월 27일부터 지난해 말까지 경사진 곳에서 미끄럼 방지 의무를 하지 않아 단속된 경우는 전국을 통틀어 35건에 불과했다. 하준이 엄마 고유미(38)씨는 “미끄럼 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를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단속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며 “개정 도로교통법이 문자로만 존재하는 ‘죽은 법’이 되지 않으려면, 정부가 법 내용을 홍보하고 단속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문 주차장의 경사도는 2%로 낮은 편에 속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시민들은 주차시 사이드브레이크만 사용하면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주차장에서 만난 문모(39)씨는 “연간회원권이 있어서 아이들과 가끔 오는데 사이드브레이크만 잘 사용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관광버스 기사 정모(53)씨도 “이 정도 경사는 사이드브레이크만 사용해도 충분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경사가 심하지 않다고 해서, 사이드브레이크만 믿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사이드브레이크를 사용하더라도 브레이크가 제대로 안 걸릴 때가 있고, 특히 오래된 차량의 경우 기능이 떨어져 경사진 곳에선 차량이 미끄러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임목을 설치하거나, 가장자리에 주차한 경우라면 핸들을 꺾어 차가 미끄러져도 벽으로 부딪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준이가 떠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서울랜드 동문 주차장은 여전히 경사진 채로 있다. 시민들이 스스로 고임목을 받쳐 놓지 않는 한 언제라도 미끄럼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가 날 수 있다는 뜻이다. 경사가 덜한 곳도 차량이 한 번 밀리면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보행자가 다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고유미씨가 근본대책으로 줄기차게 요구했던 주차장 평탄화 공사는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서울대공원 관계자는 “하반기까지는 공사를 시작해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족들은 귀한 자식의 이름까지 내주며 법을 만들었는데, 크게 달라진 게 없을 때 가장 답답해했다. 특히 비슷한 사고로 사망자가 나올 땐 더욱 괴로워했다. 지난달 18일 부산에서 만난 고(故) 윤창호씨의 아버지 윤기현(54)씨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아 착잡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직전 음주운전 차량이 다른 차를 들이 받아 모녀가 크게 다쳤다는 보도가 나온 데 따른 반응이었다. “사상자가 더 많이 날 수 있다는 점에서 칼보다 차가 더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될 필요가 있어요. 음주운전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해요.”

윤창호법이 만들어진 후 음주운전 사고는 감소세에 있다. 하태경 새로운보수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1~6월)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7,030건이며, 사망자는 133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동기 대비 각각 30%와 23% 줄어든 수치다. 문제는 상습적으로 음주운전을 일삼는 이들이다. 음주운전 재범률은 44.7%(2017년 기준)에 달한다. 음주운전을 했던 사람이 또 다시 운전대를 잡는 것을 막지 못하면, 사고를 줄이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윤창호씨 친구들은 윤창호법 2탄을 준비하고 있다. 윤씨 친구 이영광(24)씨는 “사망자 수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음주차량에 치여 죽는 사람들이 많다”며 “음주운전을 하면 의무적으로 치료를 받도록 하는 법안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산업현장에선 김용균씨 사망사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죽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855명에 달했다. 김용균법(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통과로 원청 사업주의 책임이 일부 강화됐지만, 산업재해를 줄이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특히 도급금지 범위가 축소되면서 김씨가 사고를 당한 전기사업설비 점검 등의 위험작업은 여전히 하청업체가 맡고 있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저작권 한국일보] 고(故) 김용균씨 모친 김미숙씨가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김용균재단 회의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씨는 “법만 통과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노동 현장에 위험요소를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고(故) 김용균씨 모친 김미숙씨가 지난달 31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김용균재단 회의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씨는 “법만 통과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노동 현장에 위험요소를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정우준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은 “올 들어 언론에 보도된 산업재해 사망자 수만 50명이 넘는다”며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다 숨진 비정규직 김군이나 김용균씨와 동일한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이 똑같은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계속 있다”고 말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도금과 수은 납 가공 등 일부 분야에서 도급 금지를 적용하는 것만으론 법 효과가 약하다”며 “김용균법을 왜 제정하려고 했는지 정부가 취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마련된 법이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예강이 엄마 최윤주(44)씨는 “진료기록 블랙박스법이라고 불리는 제2예강이법의 경우 아직도 잘 모르는 분이 많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제2예강이법은 병원이 진료기록을 수정할 경우 원본과 수정본을 모두 보관하도록 한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 의료법을 말한다. 이 법은 2018년 2월 통과돼 현재 시행되고 있다. 최씨는 “진료기록은 소송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인데, 기록을 병원 측에서 유리하게 고치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며 “이런 법이 있다는 걸 알고 진료기록 원본과 수정본을 병원에서 받아 확보한다면 소송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윤이법의 경우 막 통과해 판단하긴 이르지만 우려가 없지 않다. 법이 생겨도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윤이 엄마 허희정(41)씨는 “중대 환자안전사고 발생 때 보고를 의무화하도록 했지만, 병원이 과태료(200만원)를 우습게 여기고 보고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보고를 하지 않아 적발된 병원은 정부 평가 등 각종 인증을 받을 때 페널티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김민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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