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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고서점 '통문관’… “책 가치 알면 보물, 모르면 종이뭉치”

입력
2019.09.21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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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 

1934년 서울 인사동길 중앙통에 문을 연 통문관(오른쪽 사진)은 국내 현존하는 서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현재의 통문관은 외벽을 한 차례 단장했을 뿐 내부는 그대로다. 현판 속 글씨는 서예가 유희강 선생이 썼다. 통문관 제공
1934년 서울 인사동길 중앙통에 문을 연 통문관(오른쪽 사진)은 국내 현존하는 서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현재의 통문관은 외벽을 한 차례 단장했을 뿐 내부는 그대로다. 현판 속 글씨는 서예가 유희강 선생이 썼다. 통문관 제공


서울 인사동 중앙통 한자리를 85년째 지켜왔다. 백 년 서점을 꿈꾸는 노포(老鋪), ‘통문관’이다. “항상 제가 하는 얘기가 한결같으면 망하진 않는다는 겁니다.” 삼대째 이어져 온 통문관의 현 주인 이종운(50)씨 말이다. 할아버지인 이겸로(1909~2006) 선생이 1934년 문 연 가게를 29세 때 물려받았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지천명을 바라본다.

"제가 아니고, 통문관이 아니라도 어떤 분이 어떤 이름의 서점으로 어디선가 이런 곳을 운영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은 과분하게도 제가 하게 된 것뿐이고요." 겸손한 그의 말에선 동시에 자부심이 배어난다. 한결같았던 덕에 통문관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됐다. 고서부터 고문서, 희귀본, 절판본을 사고판다. 단순히 고서를 파는 곳이 아니라 이젠 그 자체로 역사다.

 ◇3대째 이어 오는 가장 오래된 서점 

통문관의 시작은 앞서 말했듯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 때 고서점 직원으로 일하던 이겸로 선생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서점을 하나 사들였다. 처음엔 통문관이 아닌 금항당(金港堂)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이름만 보고 전당포로 오인되는 바람에 통문관으로 다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이곳은 국학 연구자들의 사랑방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통문관을 드나들었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한 언론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당시 국학 연구자치고 통문관에 드나들지 않은 분이 없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고 전한다. 이겸로 선생은 '고서점계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다. 스스로 서지학자이자 국학자였다. 실제 많은 국학 서적을 발굴하고, 펴내기도 했다. 6·25 때 폐허 속에 나뒹구는 책더미 속에서 '월인천강지곡'을 찾아냈다. 그렇게 수집 발굴한 고서들을 영인본 등 형태로 출간도 했다.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황금 시대를 누렸던 통문관은 인사동과 성쇠를 함께했다. 1960년대만해도 인사동에는 통문관 같은 서점이 30~40군데 있었다고 한다. 인사동은 한때 출판의 중심지였다. 인근 종로2가와 을지로2가에 인쇄소가 많았다. 책을 만들면서 판매를 하는 곳이 꽤 됐다. 그런 인사동 분위기가 바뀐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다. “예전엔 007가방에 현금을 가득 넣어 가져와서 책을 사곤 했어요. 고서뿐 아니라 그림, 공예품 등 거래가 활발해서 이 길에 은행만 세 곳이나 있었죠. 이젠 다 없어졌지만요.”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들고, 중국산 기념품 가게들이 밀고 들어왔다. 기존 인사동 터줏대감들은 하나 둘 뿔뿔이 흩어졌다. “가게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 보면 우리가 개밥에 도토리 같단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 동네에서 통문관은 몇 안 남은 오래된 가게다.

지천명의 이종운씨는 29세 때부터 이 자리에 앉아 한결같이 통문관을 지켜왔다. 어릴 적 할아버지인 이겸노 선생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던 자리이기도 하다. 배우한 기자
지천명의 이종운씨는 29세 때부터 이 자리에 앉아 한결같이 통문관을 지켜왔다. 어릴 적 할아버지인 이겸노 선생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던 자리이기도 하다. 배우한 기자

 ◇모르는 사람에겐 ‘종이뭉치’일 뿐 

“집안 분위기는 무시 못하잖아요. 보고 들은 게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문관을 맡게 됐어요. 집에 가면 끈으로 엮은 고서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늘 어깨너머로 봐 오던 일이니까요.”

대학 졸업 후 IT회사에 다녔던 이씨는 1997년 부친이 작고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통문관의 3대 주인으로 대를 이었다. 청운초ㆍ중과 경복고를 나온 종로 토박이인 그는 하교 후 항상 통문관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5, 6세 때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던 기억도 또렷하다. 바로 지금 이씨가 하루 종일 앉아 통문관을 지키는 이 자리에서다. 통문관은 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눈 뜨면 책 정리하고, 고칠 거 고치고, 낮에는 통문관에 나가 있죠. 저녁에는 또 새로 들어온 책을 서지적으로 정리합니다. 저도 처음 보는 책이 많아서 공부할 것도 많아요.” 매일 오전 5시면 눈이 떠진다는 이씨는 책을 돌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12평 남짓 되는 통문관에는 약 2만권의 장서가 있다. 창고에 보관된 것까지 합치면 10만권 정도다. 항상 10만권 수준으로 장서 수를 유지한다.

“3대째 노포 맛집도 맛이 같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 입맛은 자꾸 변하거든요. 근간을 유지하지만 조금씩 맛이 변하죠. 통문관도 그래요.” 시류에 따라 통문관도 채비를 달리했다. 과거엔 한자로 쓰여진 고서들이 주였고, 값어치도 더 나갔다. 하지만 최근엔 현대문학서들이 강세다. 이씨는 “지금은 현대문학 책들이 웬만한 고서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린다”며 “3년 전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경매에서 1억3,0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통문관에도 한용운의 ‘님의 침묵’ 초판본이 있다. 최근 경매에서 4,000만원을 호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귀한 책은 통문관 구석 금고에 모셔둔다. 고려 말 불경부터 조선 초기 문집, 임진왜란 전후 간행본 등까지 고서도 여전히 취급한다.

시대에 발맞추려다 보니 인터넷에 홈페이지도 열었다. 물론 몇 백 만, 몇 천 만원에 달하는 비싼 책을 사진 몇 장 보고 사는 사람은 없다. 한 번에 거래되는 책도 잘 없다. 그는 “여전히 지금도 일단 ‘이런 책이 있느냐’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고, 물건이 있으면 실제 가게에 와서 직접 보고, 가격도 ‘네고’를 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물론 장단도 있단다. 그는 “정보가 다 공개되면서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책을 잘 몰라서 1만원에 팔뻔한 것을 다른 데서 100만원에 파는 걸 보고 잘못 파는 경우가 준다”며 “하지만 사는 사람은 동시에 보물 줍는 느낌이 사라진다”고 전했다.

책의 역사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고서는 그저 ‘종이뭉치’일 뿐이다. 그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책은 구한말에 나온 ‘한국체신사업연혁소사’다. “광무시대 나온 우표 실물을 붙여 낸 책이에요. 실제 돌아다니는 게 별로 없는 귀한 우표거든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되게 귀한 책이죠.”

통문관 내부는 고서 2만여권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방에 빽빽이 쌓여있다. 배우한 기자
통문관 내부는 고서 2만여권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방에 빽빽이 쌓여있다. 배우한 기자

 ◇오래가게, 통문관 

통문관은 오전 10시 30분에 열고, 해가 지기 전 닫는다. 주말에 무턱대고 왔다가는 허탕치기 십상이다. 아는 사람만 오면 된다는 게 통문관의 고집이다. 매일 얼굴이 익은 손님만 열 명 남짓 통문관을 찾는다. 이씨는 “한복 입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책 뽑아 들고 사진을 찍고는 아무데나 두고 가버린다거나 고로케(크로켓) 먹은 손으로 책을 만져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며 “인사동에 왔다가 아는 사람은 들어와서 보는, 처음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가게 정도로 만족한다”고 설명했다. 통문관에는 ‘촬영 금지’라고 써진 팻말이 잘 보이는 곳에 붙어 있다.

한때 잠시나마 ‘고서 재테크’로 사람들이 통문관을 찾던 때도 있었다. 대부분 중간에 그만 둔다. “당장 환금성만 보고 ‘시간’을 생각하지 못해서죠. 고서는 시세가 변하려면 최소 10년은 바라봐야 합니다. 100만원에 산 책이 50년 후 10억원이 된다고 쳐요. 이게 남는 장사인가요?” 그는 이어 “물론 젊었을 때 사놓으면 말년에는 도움될 정도의 자산 증식은 된다”며 “연금이라 생각하면 나쁘진 않다”고 귀띔했다.

그에게 통문관은 이름 그대로 ‘책’이 통과하는 곳이다. “필요 없는 사람이 물건을 내놓고, 필요한 사람이 와서 가져가는, 그런 ‘장터’를 열어 나가는 게 제 역할이 아닐까요.”

책을 멀리하는 최근 세태는 아쉽기만 하다. “요즘 사람들은 눈으로 들어가 바로 소화나 배설이 되는 것들을 즐기죠. 글은 눈으로 들어가 머리로 올라가야 해요. 그래서 싫어하죠. 사람들에게 책이 그저 무거운 종이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게 안타까워요.” 내면보다는 외모를 가꾸는 데만 치중하는 상황에도 우려를 표했다.

이런 마당에 통문관은 우리 역사와 기록을 지켜온 그간 임무를 언제까지 다할 수 있을까. 그는 “고서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주는 것은 맞지만 사양산업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유럽도 희귀본을 파는 곳이 꼭 있어요. 분위기는 다 똑같죠. 들어오는 사람은 어쩌다 한 명이고. 하지만 수요가 적은 만큼 공급도 적고, 그 안에서 합일점을 찾아 나가면서 어떻게든 굴러가게 마련입니다.” 통문관은 서울시가 문화적 가치가 있는 노포를 발굴해 정하는 ‘오래가게’이자 ‘서울미래유산’이다.

그는 슬하에 1남을 두고 있다. 아들이 4대를 잇도록 강요하지는 않지만 통문관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는 그는 “혹시 몰라 아들에게 한문은 가르쳤다”며 웃었다. 통문관의 역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 하루가 멀다 하고 동네 풍경이 바뀌는 한국에서 수십 년간 묵묵히 버텨낸 가게들이 있다. 사람이 오가고 물건이 드나드는 가게에는 세월만큼의 이야기가 쌓여 ‘기억의 지층’을 이룬다. 한 입 물면 입안에 한 시대가 들어오는 음식점, 시대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옷 가게, 시간의 무게를 담은 이발소와 목욕탕… 한국일보는 전국 방방곡곡의 오래된 가게를 통해 한국의 변화상을 격주로 연재한다. 수십년간 장사를 이어간 비법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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