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커피벨트를 가다] 커피와 빈곤의 함수관계(상)

입력
2019.06.19 17:03
0 0

 <6회> 에티오피아 커피 농가의 가난 

이르가체페 여인들이 커피 열매의 과육을 벗겨내고 내과피(파치먼트) 상태의 생두를 뒤섞어 골고루 건조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일들은 주로 여자들이나, 노인, 아이들의 몫이다. 최상기씨 제공
이르가체페 여인들이 커피 열매의 과육을 벗겨내고 내과피(파치먼트) 상태의 생두를 뒤섞어 골고루 건조하고 있다. 이런 단순한 일들은 주로 여자들이나, 노인, 아이들의 몫이다. 최상기씨 제공

진실의 신이시여.

하늘과 땅의 신이시여.

아름다운 이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조물주여.

우리 농부들이 이 땅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삶을 바꾸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소서.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소서.

-에티오피아 커피 재배 농부들의 기도 (영화 ‘Black Gold’ 中에서)

커피 밭을 걸어 나와 커피 열매를 가공하는 시설(Preparation Station)로 자리를 옮겼다. 각 농가에서 재배한 커피 열매를 처리해 씨앗인 생두를 분리해내는 작업장이다.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가들은 소출 규모가 작아 마을 단위의 공동 가공시설을 운영하거나, 지역마다 처리시설을 갖춘 회사에 수확한 커피 체리를 팔고, 이런 작업장에 함께 모여 열매를 말리거나, 선별하는 일을 한다.

이 곳의 남자들은 여러 농가에서 수확해온 커피 열매의 무게를 재고 물로 씻어 껍질과 과육을 벗겨내거나, 가공한 생두를 포대에 담아 나르는 일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 예컨대 커피 열매나 생두를 건조시키고, 좋지 않은 콩들을 골라내는 작업들은 주로 여자들이나 노인, 아이들이 맡아서 한다. 단순한 일인만큼 수입은 매우 박하다.

수확기여서인지 커피를 말리는 건조대 위에는 커피 열매 또는 과육을 벗겨낸 내과피(Parchment) 상태의 생두들로 가득하다. 커피를 건조하는 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커피를 뒤집어주는 일을 하던 여인들이 경계심 없는 미소로 낯선 이방인을 반겨준다.

잠시 후, 분나(Bunnaㆍ커피) 대접을 받았다. 즉석에서 생두를 볶고 절구통에 넣어 빻은 후, 제베나라 불리는 토기 주전자로 끓여 손님에게 내주는 에티오피아의 전통 커피 의식이다. 커피 추출 과정이 길고,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한 잔의 커피가 나오려면 30분 이상 족히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바쁜 손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

이윽고 작은 분나 잔에 더 이상 신선할 수 없는 커피가 담기고, 마을 주민들과의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커피 맛을 음미할 틈도 없이 다짜고짜 커피 가격이 왜 낮은지 물어온다. 느닷없이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들의 하소연이 길게 이어진다. 지금처럼 커피를 재배해서는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계, 다시 말해 가족들이 끼니를 이어가거나 깨끗한 물을 마시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커피 가격에는 시장이라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기에 나에게서 들을 수 있는 답이 별로 없다는 것을 농민들도 잘 알 것이다. 이 문제는 나와 그들, 또는 이르가체페 지역이나 에티오피아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 지구인들의 커피 수요와 공급에 따른 복잡한 요인들이 얽힌 거대 담론이어서 간단한 대답으로 그들의 답답함이 풀리기는 어렵다.

제베나 분나. 에티오피아의 전통 커피 의식. 한자리에서 생두를 볶고, 볶은 원두를 절구로 빻아 주전자(제베나)에 담아 끓인다. 농장 사람들은 멀리서 온 손님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다. 최상기씨 제공
제베나 분나. 에티오피아의 전통 커피 의식. 한자리에서 생두를 볶고, 볶은 원두를 절구로 빻아 주전자(제베나)에 담아 끓인다. 농장 사람들은 멀리서 온 손님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했다. 최상기씨 제공

산업적으로 커피시장의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은 지구온난화다. 이미 기상이변으로 냉해와 가뭄, 홍수 등으로 지역에 따라 매해 적지 않은 생산량의 진폭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의 기후변화가 지속된다면 2080년쯤 에티오피아 커피 생산지의 약 85%가 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건기의 기온이 높아지고, 우기의 강수량이 감소하는 등 기후 환경이 변화하면 커피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줄어들면서 커피 생산량이 감소하고, 결국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지금보다 훨씬 값비싼 음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커피를 생산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 나라의 농부들에게 지금 당장의 가장 큰 위협은 가격 변동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터무니없이 낮은 커피(생두) 가격이다. 에티오피아 커피는 매년 평균 7억 6,000만달러어치가 해외로 판매돼 단일 품목으로 이 나라의 최대 수출품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는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국민들의 건강 교육 인프라와 기타 사회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의존하는 외화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그래서 커피 가격이 떨어지면 커피 농가뿐 아니라, 국가 전체 경제가 위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데 반해, 커피는 에티오피아 농가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기본적인 수익원이 되질 못한다.

유엔의 보고서에서는 구매력 지수가 1인당 하루 1.9달러 아래일 때를 극단적인 빈곤 상황으로 본다. 현재 8억 정도의 지구인이 이 계층에 속하는데, 이 중 약 5,000만~1억명의 인구는 커피를 재배하고 있거나, 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으로서의 커피는 빈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등식을 이루는 셈이다.

왜 그렇게 가난할 수밖에 없을까. 문득 커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르가체페 농가들의 소득이 궁금했지만, 미안한 마음에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이미 그들의 삶의 모습과, 살고 있는 환경에서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 구체적으로 확인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밤 늦은 시간 이르가체페를 떠나오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대략의 답은 나도 알고, 이 곳에서 커피를 생산하는 농민들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세계에는 어떤 경제적인 역학관계가 내재되어 있을까. 이르가체페 농민들이 품질 좋은 커피를 생산하고도 빈곤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잡한 연결고리로 묶여진 커피와 빈곤의 함수관계, 그것이 몹시도 궁금했다.

최상기 커피 프로페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