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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기생충’, 계급사회의 양자역학

입력
2019.06.19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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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스틸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생충' 스틸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나도 반지하 방에서 산 적이 있었다. 대학을 5년째 다니던 해에 학과 선후배들과 함께 했던 방 세 개짜리 월셋집이었다. 지대가 낮아 가끔 하수구가 역류하면 역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반지하는 대체로 환기가 잘 되지 않으니 금상첨화(?)였다. 비가 많이 오면 혹시 집안으로 물이 들이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이 집에서 1년 사는 동안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며 과외로 생활비도 벌었으니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25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반지하에 살면 돈 많이 벌어서 영화 속 저택 같은 집을 사겠다는 망상보다 저런 저택에서 오래오래 과외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이 앞선다.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은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발걸음 아래에서 내 일상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도 엄연히 계급이 있고 나는 그 바닥 아래에 있다는 각성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온몸을 파고든다. 쪽방이나 고시촌, 비닐하우스처럼 더 열악한 주거환경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봉준호 감독에겐 수직의 위계질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에 반지하가 더 적합했을 법도 하다.

계급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 영화는 많았다. 봉준호 감독 자신도 ‘설국열차’를 찍었다. 계급사회의 모순을 다루는 기존의 익숙한 문법은 선량하고 무고한 하층민과 탐욕스럽고 특권으로 똘똘 뭉친 상류층의 대립이다. 이런 클리셰와 어울리는 인물로 나는 종종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한다. 플라톤의 제자답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엄격하게 나누었고 서로 다른 자연의 법칙을 부여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달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굳이 천상계와 지상계를 나눌 필요가 없다. 뉴턴은 보편중력(또는 만유인력)의 법칙 하나로 천상계와 지상계를 통합했다. 그의 법칙에 보편(universal)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현실도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뉘어있다. 가령 재벌 총수들이 살고 있는 천상계에는 법전에도 없는 이른바 ‘3.5 법칙(징역3년, 집행유예5년)’이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천상계에는 유전무죄의 법칙이, 지상계에는 무전유죄의 법칙이 적용된다. 수백 년 전 뉴턴이 극복한 아리스토텔레스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는 멀쩡히 살아 있다. 지금까지 계급 갈등을 다룬 영화들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는 뉴턴의 이야기였다.

‘기생충’은 다르다. 저택에 살고 있는 박 사장 가족들은 그저 냄새에 좀 민감할 뿐 딱히 사악하거나 탐욕스럽지도 않다. 그저 가족사기단에 속아 봉변을 당했을 뿐이다. 반지하 출신 기택 가족의 사기극과 그의 마지막 선택은 기존의 선악구도를 무너뜨렸다. 관객들이 혼란과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기생충’의 독특함이 여기 있다. ‘기생충’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점은 올봄에 개봉한 조던 필 감독의 ‘어스’와 아주 비슷하다. 아무리 내려가도 보이지 않는, 폭우에 잠겨 자취를 감춰버린 반지하집과 지하 벙커는 저택 사람들에게는 가려진 세계이다. 보이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언론에게) 기택네 행위는 위조와 배신과 사기와 ‘묻지마 살인’일 뿐이다. 부잣집에 기생해서 먹고 사는 주제에 어쩌자고 ‘숙주’까지 제거했냐고 야단칠지도 모른다. 생태계에서 대책 없이 숙주를 죽이는 기생충이 있다면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비슷한 논리를 지금까지 우리는 숱하게 들어왔다. 어쨌든 한국을 먹여 살리는 건 재벌 대기업이 아닌가, 약간의 허물은 봐 줘야 한다, 재벌 잡으려다 우리 모두 다 죽는다, 등등.

봉준호 감독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새로운 법칙을 찾아냈다. 대책 없이 숙주를 파멸시키는 기생충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름은 가려진 세계의 호모 사피엔스였다. 아마도 사피엔스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에겐 단순한 ‘먹고사니즘’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또 있으니까. ‘기생충’은 이 기막힌 파멸의 구조적인 개연성을 보여준다. 보이는 세계의 옳고 그름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지상계의 사람들과 언론이 숙주의 언어로만 세상을 기술해 왔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 세계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해석해 봐야 한다. 그래야만 기생충이 숙주와 공멸하는 파국을 막을 수 있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눈에 보이는 거시적인 세상에 잘 적용되는 과학이다. 원자 이하의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로 내려가면 보다 근본적인 원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거시세계의 상식과 직관이 통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생각의 회로를 바꿔야 한다. 반지하와 지하 벙커의 세상도 다르지 않다.

양자역학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법칙이다. ‘기생충’이 발견한 ‘계급사회 양자역학’은 아름답다기보다 서글프다. 그 세계의 아들 기우가 숙주 세계의 법칙을 이용해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모습이 더욱 슬프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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