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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덩샤오핑의 승리

입력
2019.06.17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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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鄧小平)이 1986년 6월 중앙군사위 확대회의를 주재하면서 중국군 감축계획을 밝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덩샤오핑(鄧小平)이 1986년 6월 중앙군사위 확대회의를 주재하면서 중국군 감축계획을 밝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9년 봄, 베이징 톈안먼 광장 민주항쟁은 실패한 반공산주의 운동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해 6월 3~4일, 중국이 시위대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동안, 중유럽에서는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가을엔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이어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이긴 했지만 루마니아에서도,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로부터 2년이 안 되어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개방된 소련이 마침내 분열됐다.

이 같은 민주혁명은 그보다 몇 해 전 동북아 및 동남아에서 일어난 ‘민중의 힘’에 의한 저항의 연속이었다. 당시에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영원히 승리했다고 믿는 미국인은 프랜시스 후쿠야마만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열린 사회는 자연스런 공생관계로 받아들여졌고 궁극적 체제로 여겨졌다. 중산층이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었다.

당시 냉전 후 자유주의 승리의 함의는 그만큼 확고해서, 많은 서방 국가, 특히 미국에서는 많은 정부규제로 자유기업의 야성적 충동을 더 이상 억누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는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이후 유럽에 전하는 메시지였다.

중국은 이런 흐름의 예외로 남았다. 쿠바나 북한 같은 후미진 곳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산체제가 우세한 곳이었다. 중국은 아직도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지 않은 것을 공산주의의 승리로 볼 수 있을까? 무방비 상태의 학생과 시민의 학살을 통해 실제로 오롯이 드러난 것은 전혀 공산주의라 할 수 없는 덩샤오핑식 권위적 자본주의다.

덩샤오핑은 수년간 지속된 마오쩌둥식 자립경제를 포기하고 중국을 국제경제에 개방해, 서방으로부터 찬사를 받아 왔다. 그는 “누군가 먼저 부자가 되게 하라”는 말로 자본주의 기업에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은 이제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는 이 사상을 부패에 항의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로부터 지켜 내야 했고,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탱크로 저항을 진압했다. 어느 당 지도자는 “외국인들이 투자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외국 자본가들은 돈을 벌고 싶어하고, 중국처럼 큰 시장을 버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건은 금기의 주제가 됐다. 경제는 곧 부흥했고, 1989년 학생시위대의 대부분을 구성했던 학식 있는 도시민층이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싱가포르나 심지어 일본의 부유한 시민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혜택을 입게 됐다. 두 나라 모두 독재국가는 아니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일당제 국가의 권위에 이의를 품지 않는 다면, 부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국민에게 제공한 것이다.

학식 있는 젊은 중국인조차도 30년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안다 해도, 외국인이 그에 대해 말하면 마치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 거칠게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반응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방어적인 태도가 톈안먼 사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그 대가로 누리게 된 부당한 이익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 때문으로 여기기도 한다.

푸틴이 권력을 잡은 지 1년 후인 2001년, 나는 베이징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했고, 러시아를 중국보다 유리하게 평가한 기사를 썼다. 러시아가 개방적 민주주의로 순항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틀렸다. 사실,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덜 성공적이긴 했지만, 덩샤오핑의 중국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고 모스크바의 일부분은 새로운 금박시대가 도래한 듯한 인상을 준다.

중유럽 상황도 비슷했다.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는 자유를 제한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번창할 수 있는 억압적 일당통치제인 ‘제한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냉혹한 이론가이다. 서유럽의 우익 포퓰리스트 정치 선동가들과 심지어 미국도 이를 따라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두 푸틴의 전적인 추종자들이다.

물론, 이런 흐름은 필연적인 건 아니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대부분 다른 서방 국가에서도,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분리 할 수 없다는 믿음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가 억압되는 일당체제에서도 부유한 기업인이나 심지어 부유한 중산층 소비자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중국 이전부터 존재했다. 싱가포르는 권위적 자본주의의 완벽한 예를 보여 준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사례는 싱가포르가 너무 작거나, 아니면 아시아인이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간과됐다. 1989년 중국의 저항운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은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톈안먼 저항의 실패 후 중국 상황은 또 다른 진실을 가리킨다. 1989년 당시 중국은 결코 공산주의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이단자가 아니었다. 비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독재자들에게도, 30년 전 공산통치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 국가에서도 매력적인 모델로 부상했다. 중국은 그 체제를 앞서 이룩했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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