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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건투를 빈다

입력
2019.06.15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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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날아라 슛돌이3' 영상 캡처
KBS '날아라 슛돌이3' 영상 캡처

“잘하는 거 뭐야? 특기 말이야?” 앞니 빠진 여섯 살 꼬마가 수줍게 답했다. “축구요. 축구밖에 없어요.”

말 그대로 아이는 축구를 매우 잘했다. 저 두 발로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게 신통하다 싶을 만큼 작은 체구로, 키 큰 형들 사이를 빙그르르 돌며 지네딘 지단의 전매 특허인 일명 마르세유 턴을 시도하는가 하면 볼트래핑까지 능숙하게 해냈다. 그 앙증맞은 모습을 보면서 ‘역시 운동신경은 타고나는 것이구나.’ 혼자 감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2-0인가로 지고 있던 경기 후반전에 양 볼이 발그레한 아이가 연이어 골대 안으로 공을 차 넣었을 때 이 예능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에서 축구해설을 맡았던 개그맨 이병진은 국가대표 출신 유상철을 놀려댔다. 벼랑 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당신의 3기 슛돌이 감독 자리를 저 꼬마가 구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아이는 운동신경만 타고난 게 아닌 듯했다. 골을 넣은 뒤 같은 팀 아이들이 육탄전을 방불케 하는 축하 세례를 퍼부을 때에도 그저 해맑게 웃으며 함께 잔디밭을 데굴데굴 뒹굴고 훈련 중간중간, 스태프로 출연하는 어른들에게도 착착 안기곤 했다. 어느 날인가, 훈련을 하다 달려온 아이가 슛돌이 3기 감독을 맡은 유상철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유 감독이 비스듬히 누운 아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말도 잘 듣지, 볼도 잘 차지, 귀엽지. 흠이 뭐야?” “네?” 아이가 반문했다. ‘흠’이란 단어의 의미를 저 어린아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유상철 감독이 볼을 만지며 중얼거리듯 반복했다. “말도 잘 듣지, 볼도 잘 차지…” 그 말을 들은 아이가 새카만 눈동자로 감독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볼이 뭐예요?”

주말마다 TV에 시선을 고정하던 수많은 시청자에게 이 장면은 압도적인 감동을 선물했다.

귀여운 그 꼬마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스포츠뉴스에 스페인 라리가에서 뛰고 있다는 축구 유망주 이강인 관련 뉴스가 간간이 나올 때도 흘려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지난 3월 초, A대표팀에 소집돼 파주 트레이닝센터로 향하는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아, 그 슛돌이다!”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 꼬마가 언제 저렇게 컸지?’ 하며 잠시 놀랐지만, 헤아려보니 벌써 12년 전 일이었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잘 자라서 아빠 키를 훌쩍 넘는 청소년으로 변신하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다.

열여덟 살이 된 그 소년과 친구들이 다시 한번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 이번 FIFA U-20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이강인은 “목표는 우승!”이라는 일성을 남겼다. 12년 전의 귀여운 꼬마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조차 “고놈, 배포 한번 크게 자랐네.” 껄껄 웃으며 그 말을 흘려 넘길 때 U-20 대표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현실화시키는 길로 내달렸다. 한일 맞대결이 성사된 16강전에서 목청을 돋워가며 애국가를 부르던 선수들의 모습은 얼마나 대견했던가. 후반전 극장 골로도 모자라 연장과 승부차기로 이어진 세네갈전은 또 얼마나 짜릿했던가. 내친김에 남미 축구의 자존심으로 남은 에콰도르까지 누르고 결승전을 앞둔 지금, 사람들은 사상 첫 FIFA 주관 대회 우승의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 한편으로 또 다른 희망을 꿈꾼다. 12년쯤이 더 지났을 즈음,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라운드에 서서 애국가를 우렁차게 불러젖히는 저 친구들은, 아기 곰 같은 눈빛으로 턱을 긁으며 공을 떨어뜨릴 공간을 찾던 천재소년은 어디서 자신만의 축구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될까?

부디 이들의 플레이가 찬란하게 지속되기를, 그 이야기 속에서 내일 펼쳐질 결승전 한 순간의 환희도 잊히지 않을 명장면으로 각인되기를….

건투를 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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