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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공경과 차별: 장유유서의 양면

입력
2019.06.1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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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비정상회담’ 방송 캡처
JTBC ‘비정상회담’ 방송 캡처

어느 누구도 성별, 연령, 인종, 종교, 정치적 성향, 성적 지향성에 의해 차별하지도 차별받지도 않아야 한다. 많은 민주국가들이 추구하는 덕목이다.

우리 문화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 대체로 더 많은 발언권을 갖고, 더 많은 경험과 경륜이 있다는 전제하에 대접받는다. 나이에 기반한 공경을 받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질서가 이 사회를 단단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어 왔다는 공감대. 예전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지금도 상당히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젊은 시절 그런 질서를 내면화하고 실천해 온 사람일수록, 나이가 들었을 때 젊은 세대에 그런 대접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연공서열 질서는 여전히 힘이 세다. 직장에서 직급과 나이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흔해졌다지만, 직급을 우선하는 사람조차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자리에서는 부하를 나이로 대접해 줄 때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적인’ 상급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필자가 미국에서 가르칠 때 교환학생으로 온 한국인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와 수강한 적이 있었다. 수강신청이 늦은 학생들이었기에 한 조로 묶어 과제를 부여했다. 많은 기대를 했는데 현지 학생들과 달리, 2주 차, 3주 차가 되어도 과제수행에 진척이 없었다. 관찰해 보니 한국식 나이, 만 나이, 초등학교 입학 연도, 학번, 군번, 심지어 대학 재수 여부까지 따져가며 서열을 매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속으로 무척 한심했지만 두고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4주 차가 되어 갑자기 과제진행에 속도가 붙었다. 마음 좋고 털털한 녀석이 동년배들과 팽팽히 자존심 게임을 해오다 내가 막내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막내가 확정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가 ‘왕고(참)’인지도 확정되어야 했다. 삼수를 해서 대학을 늦게 간 ‘형’ 한 사람이 ‘왕고’가 되었다. 왕고와 막내가 확정되자 갑자기 일의 효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학기 중반에 이르러 교환학생조의 성과는 현지 학생들과 비슷해졌다. 심지어 더 나은 면도 있었다. 불과 2, 3주 만에 벼락치기로 따라잡은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선의에서 막내를 자임한 친구가 대부분의 일을 다하고 다른 학생들은 ‘형’의 지시에 따라 약간의 기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솔선수범을 해야 할 ‘형’은 가끔 막내의 일처리를 점검할 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는 학기말에 상당히 괜찮은 결과가 나오자 당당히 본인을 ‘팀 리더’로 소개하고 발표를 했다. 실제로 일을 누가 했는지 꼼꼼히 관찰해 온 내가 실제 일하지 않고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막내가 답했다. 그리고 막내는 최고 학점을 받았다.

마음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다. 어려운 일에 앞장서지 않으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없다. 나이만으로 군림하는 리더는, 조직에서 쓸모가 없어지면 갑자기 낯선 노인 취급을 받게 된다. 그게 대한민국 조직의 비정함이다. 이런 내치기는 이제 40대만 되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능력과 경륜이 넘치는 인재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전히 우리의 기업과 공공 조직에서는 특정 연도 이전 출생자는 전부 용퇴하거나 권고사직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이웃에 살던 미국인은 나이 40이 넘어 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50대에 전문의가 되어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니, 왜 늦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인생 후반전이 가능한 나라가 선진국인데, 우리에게는 ‘나이로 군림하는’ 일부 문화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잘리는’ 문화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바꿔야 한다.

김장현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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