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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독일과 소련 사상 최대 전차전, 승부 가른 건 병력이 아니었다

입력
2019.06.01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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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브로디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2차대전 초반이던 1941년 6월 독일과 소련이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맞붙은 브로디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으로 기록돼 있다. 소련군 전차 BT-5이 독일군 공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 무장한 독일군이 쓰러져 있는 소련군 병사에게 다가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2차대전 초반이던 1941년 6월 독일과 소련이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맞붙은 브로디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으로 기록돼 있다. 소련군 전차 BT-5이 독일군 공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 무장한 독일군이 쓰러져 있는 소련군 병사에게 다가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소련을 향해 전격전을 개시했다. 작전명 바르바로사, 즉 ‘붉은 수염’에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세 개의 군집단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3개 군으로 구성된 남부군집단은 가장 남쪽의 우크라이나 전역을 담당했다. 위쪽의 6군, 아래쪽의 17군, 그리고 중앙의 1전차군 중 공격의 주력은 당연히 가운데에 위치한 1전차군이었다.

독일 1전차군은 3개 전차군단으로 구성되었다. 13전차사단과 14전차사단이 속한 3전차군단은 296대, 11전차사단과 16전차사단이 속한 48전차군단은 289대, 9전차사단이 속한 14전차군단은 143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다 합치면 독일 1전차군의 전차 대수는 728대였다.

◇소련의 1/6에 불과한 독일 전차 수

독일 1전차군의 상대는 소련의 2개 군, 즉 5군과 6군이었다. 5군에는 9기계화군단, 19기계화군단, 22기계화군단이 있었고, 6군에는 4기계화군단, 8기계화군단, 15기계화군단이 있었다. 각 기계화군단에는 2개 전차사단이 소속되었다. 즉 전차군단 수로 비교하면 3개 군단 대 6개 군단, 전차사단 수로 비교하면 5개 사단 대 12개 사단의 대결이었다.

독소전쟁 개전 시점의 정상적인 소련 기계화군단은 2개 전차사단과 1개 기계화사단으로 구성되었다. 각 전차사단에는 2개 전차연대가 있었고 기계화사단에도 1개 경전차연대가 있었다. 이를 다 합치면 1개 기계화군단에는 1,031대의 전차가 있어야 했다. 정상적인 편제라면 6개 기계화군단이 보유할 전차 수는 6,186대에 달했다.

실제 전차 수는 이보다 적었다. 북쪽에 위치한 5군에는 1,465대의 전차가 있었다. 특히 9기계화군단은 정원에 한참 미달하는 300대밖에 갖지 못했다. 게다가 T-26 144대, BT-5와 BT-7 134대 등 태반이 경전차였다. 453대를 보유한 19기계화군단과 712대를 가진 22기계화군단도 상황은 비슷했다.

남쪽에 위치한 6군은 5군보다 강했다. 4기계화군단의 979대, 8기계화군단의 932대, 15기계화군단의 749대를 합치면 6군은 총 2,66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즉 해당 전역의 소련군 전차 수는 모두 4,125대로 독일군의 약 5.7배였다.

독일 1전차군의 1차 목표는 공격 개시선에서 약 100㎞ 떨어진 브로디였다. 브로디를 점령하면 300㎞ 정도 더 가면 나오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로 가는 길이 열렸다. 쇄도해 들어오는 독일 1전차군을 상대로 소련 5군과 6군은 위와 아래에서 양면 공격을 시도했다. 지도상으론 완벽한 협동 공격이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브로디, 두브노, 루츠크를 연결하는 삼각지에서 벌어졌다. 덕분에 이 전투는 나중에 브로디전투 혹은 두브노전투라고 알려졌다.

브로디전투의 승패를 예측하기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 단적으로 728대와 4,125대의 싸움이었다. 피로스가 로마를 상대로 싸울 때조차도 이보다 한참 덜한 병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전투에 승리하려면 적보다 많은 병력을 가져야 함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전차 수량의 차이는 곧 생산력, 즉 경제력의 차이기도 했다.

◇전차 성능마저 뒤졌건만 압승

개별적인 전차 성능이란 면으로도 독일 1전차군은 소련 5군과 6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독일전차 중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높은 전차는 3호전차와 4호전차였다. 3호전차 중 최신형인 F/G/H는 42구경장의 50㎜ 포를 가졌다. 포구속도가 초속 685m인 이 포는 1,000m 거리에서 36㎜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4호전차 초기형은 대전차전투보다는 보병을 지원하기 위한 움직이는 야포에 가까웠다. 즉 장착된 24 구경장의 단포신 75㎜ 포는 포구속도가 초속 385m밖에 안 됐다. 1,000m 거리에서 35㎜의 장갑을 뚫는 이 포의 관통력은 42구경장 50㎜ 포에도 못 미쳤다.

소련군의 공격력 높은 전차에는 T-34와 KV-1이 있었다. 초기형 T-34와 KV-1은 31.5구경장의 76.2㎜ 포를 가졌고 1941년에 생산된 T-34와 KV-1은 42.5 구경장의 76.2㎜ 포를 가졌다. 전자의 포구속도는 초속 613m로서 1,000m 거리에서 50㎜를 뚫었고, 후자는 초속 680m의 포구속도에 60㎜의 1,000m 관통력을 가졌다. 즉 같은 거리에서 싸웠을 때 소련전차의 관통력이 1.6배 이상이었다.

방어력에서도 독일전차는 소련전차에 비해 열세였다. 단포신 4호전차의 전면장갑은 두께가 50㎜였고, 3호전차의 전면장갑 두께는 30㎜에 그쳤다. 반면 T-34의 전면장갑 두께는 52㎜로서 단포신 4호전차보다 두꺼웠고, KV-1의 전면장갑은 90㎜에 달했다.

위 두 가지 사실을 합치면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됐다. 즉 1,000m 거리에서 포화를 주고 받았을 때 T-34와 KV-1은 독일의 모든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반면 모든 독일전차는 T-34와 KV-1을 파괴할 수 없었다. 실제 전투에서도 독일전차의 포탄이 T-34와 KV-1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로 발생했다. 특히 KV는 독일 전차병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조차도 독일전차가 KV를 파괴할 방법이 없었다. 같은 시기의 다른 전역에서는 길을 막고 버티고 있는 단 한 대의 KV 때문에 독일군 1개 전차사단의 전진이 하루 동안 지연되기도 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 1전차군의 모든 전차가 3호나 4호일 리도 없었다. 기관총이 무기의 전부인 1호전차와 2호전차가 273대였고, 공격력이 부족한 37㎜ 포를 가진 체코전차 38(t)와 3호전차 E가 100대였다. 즉 총 728대의 전차 중 대전차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3호 F/G/H와 단포신 4호전차는 합쳐서 355대에 그쳤다. 반면 소련 5군에는 36대, 소련 6군에는 719대의 T-34와 KV가 있었다. 즉 이 둘을 합친 755대만으로도 독일군 전차 대수를 능가했다.

브로디전투에 참전한 소련군 19기계화군단의 전차 T-26들이 우크라이나 서북부 루츠크 지역에서 파손된 채 방치돼 있다. 위키피디아
브로디전투에 참전한 소련군 19기계화군단의 전차 T-26들이 우크라이나 서북부 루츠크 지역에서 파손된 채 방치돼 있다. 위키피디아

◇병력 아닌 전투력에 갈린 승패

6월 30일까지 9일간 벌어진 브로디전투에서 독일 1전차군은 보유 전차의 반 가까이 잃을 정도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소련 8기계화군단과 격전을 벌인 독일 48전차군단은 39대까지 전차 대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패한 쪽은 소련군이었다. 이들이 입은 타격은 독일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령, 전투 이전에 전차 932대를 가졌던 소련 8기계화군단의 경우 전투 후 207대만 남았다. 독일 48전차군단이 250대의 손실을 입는 동안 725대를 잃은 결과였다. 453대였던 소련 19기계화군단은 32대로, 712대였던 소련 22기계화군단은 136대로 줄어들었다. 749대였던 소련 15기계화군단은 7%에 불과한 53대만 남았다.

병력 규모가 전세를 좌우한다는 상식을 되짚어볼 시점이다. 이 얘기가 성립하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바로 양쪽 군대의 전투력이 똑같다는 조건이다.

전투력은 경제의 총요소생산성과 비슷한 개념이다. 경제학은 측정이 가능한 자본과 노동량으로 세상을 보려 했다. 당연하게도 모든 생산량의 증가가 자본과 노동량의 변화 때문은 아니었다. 경제학은 이를 직접 구할 방법을 몰랐다. 그저 설명되지 않는 생산량 증가를 총요소생산성이라는 간접적인 요소로 설명할 따름이었다. 즉 총요소생산성이 경제의 효율을 나타내는 지표라면 전투력은 전투의 효율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총요소생산성이 그렇듯 전투력 또한 구성 요소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독일군이 명백히 열세였던 무기의 위력이 전투력의 핵심 요소로 꼽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군대의 훈련 정도, 병사의 사기, 지휘관 전술 등 무수한 요소가 뭉뚱그려져 발휘되는 것이 전투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대는 소련 4기계화군단이었다. 개전 이전 979대의 전차를 가진 4기계화군단은 소련의 6개 기계화군단 중 가장 전차 수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T-34를 313대, KV를 101대 보유했다. 4기계화군단이 가진 T-34와 KV의 합 414대는 나머지 5개 기계화군단의 총합 341대보다도 많았다. 브로디전투 종료 직후인 7월12일자 4기계화군단의 잔존전차 대수는 68대였다. 911대의 전차가 마치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이 녹아 없어지듯 사라진 거였다. 주목할 점은 이 부대가 개전일인 6월22일부터 7월 초까지 아무런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궤멸적 피해의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정비 불량, 기계 고장, 연료 보급 혼란, 유기 등이었다.

브로디-두브노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 소련군은 결국 뒤로 물러섰다. 소련군 6개 기계화군단의 잔존 전차 수는 796대였다. 압도적인 전투력에 힘입어 독일 1전차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인 브로디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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