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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해 찾나… ‘기독교 묘지’ 언급된 러 신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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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해 찾나… ‘기독교 묘지’ 언급된 러 신문 공개

입력
2019.05.28 15:00
수정
2019.05.28 18:49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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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의거’ 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첫 심문 내용이 보도된 러시아 ‘프리 아무리예지(紙)’ 1909년 11월 2일자 지면. 국가기록원 제공
‘하얼빈 의거’ 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첫 심문 내용이 보도된 러시아 ‘프리 아무리예지(紙)’ 1909년 11월 2일자 지면. 국가기록원 제공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광복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러시아 프리 아무리예지(紙) 1909년 11월 2일자 보도)

“그는 하얀색의 명주로 된 조선 전통 한복을 입고 있었다. 사형이 집행됐다. 그 후 관은 지역 기독교 묘지로 옮겨졌다. 안은 하얼빈에 안장되길 원했고, 친척들은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가져가기를 원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다.”(러시아 우스리스카야 아크라이나지(紙) 1910년 4월 21일자 보도)

1909년 10월 26일 당시 러시아 관할이던 중국 하얼빈(哈尔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첫 심문부터 사형 집행까지 종적이 기록된 러시아 언론 보도가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지역 신문이 보도한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수집해 28일 공개했다. 안 의사 의거 다음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다음해 4월 21일까지의 기록이다. 러시아 신문 기사 내용이 단편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의거 준비부터 안 의사의 최후까지 망라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5년 국가기록원이 항일 투쟁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관련 기록을 찾던 중 발굴한 귀한 자료다.

특히 안 의사의 매장지와 관련된 보도가 눈길을 끈다. 안 의사는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된 고국에 반장(返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현재까지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유해가 없는 그의 가묘만이 조성돼 있을 뿐이다. 우수리스카야 아크라이나지 1910년 4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 의사 유해는 사형 직후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 당초 안 의사의 매장지는 교도소 내 묘지로 알려져 있었다.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은 “종전 기록과 달리 이번 기사에는 ‘기독교 묘지’란 표현이 나와서 아사히신문 등과 비교하면서 추가적인 확인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안 의사 거사에 대한 첫 보도는 1909년 10월 28일자 달리니 보스톡지(紙)의 기사로 보인다. 해당 기사는 “이토 공작(사망 당시 공식 직위는 추밀원 의장)이 세 발의 총상을 입고 사망했고, 조선인으로 밝혀진 범인이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같은 해 11월 2일자에 프리 아무리예지는 거사를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는 안 의사 모습까지 묘사한 르포 형식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는 일본 총영사관에서 있었던 첫 심문에서의 안 의사 진술이 상세히 담겨 있다. 그는 “나는 조선에서 징벌적 행위를 한 이토를 복수하기 위해 선발된 29명 중 한 명이다”며 “조국 광복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되겠다”고 진술했다.

안 의사가 거사 현장에서 러시아군 장교에 의해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는 과정도 보도됐다.(프리 아무리예지 11월 6일자) 법정 진술과 사형선고 당시의 상황도 소개하고 있다. 보스토치나야 자랴지(紙) 11월 4일자 기사는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기쁘다. 나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는 안 의사의 진술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1910년 2월 26일 재판에 대해 보도한 프리 아무리예지 1910년 2월 27일자 기사는 안 의사가 한 시간 동안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러시아인의 눈에 비친 안 의사의 모습은 시종일관 당당하고 의연했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기록물은 안 의사와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의 인식뿐 아니라 의거 준비부터 체포와 일본영사관 인계 과정 등 사후 조치 과정이 상세히 묘사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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