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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기생충의 자세

입력
2019.05.29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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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 가지 재주는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내 재주는 화장실에 잘 가는 것이다. 그게 무슨 재주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큰 장점이다. 마다가스카르의 허름한 재래시장 공중화장실이든, 사방이 뻥 뚫려 몸 하나 감출 수 없는 고비사막이든, 실크로드 위에 있는 중국 지방도로 휴게소의 문 없는 화장실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무 데서나 편하게 배설한다는 것은 아무 것이나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는 것만큼이나 여행과 탐험에 있어서 뛰어난 장점이자 재주다.

화장실 잘 가는 재주는 내 본성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화장실에 잘 가지 못 했다. 냄새나 깊이 때문은 아니었다. 재래식 화장실 저 아래서 우글거리는 회충 때문이었다. 봄이면 학교에서는 구충제를 나눠주었고 함께 먹었다. 그때부터 몸 바깥으로 회충, 편충, 요충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 회충 가운데 일부는 내게서 나간 것이다. 보지 않으면 되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학교에서 구충제를 나눠주지 않았고 나는 화장실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기생충은 도대체 어떻게 인류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빛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점막 때문에 끈적끈적할 테고, 또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게 아니라 숙주가 먹은 것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람의 장 속이 기생충에게도 별로 쾌적한 곳은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모기가 목숨을 걸고 굳이 동물의 피를 빠는 것은 모성애의 발로다. 마찬가지로 기생충이 험지에서 버티는 것 역시 모성애 때문일 것이다. 번식이라는 생명의 지고지순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나는 회충에게 고통 받지 않았다. 회충이 내 뱃속에 살 때 한 번도 복통을 앓지 않았다. 단지 구충제를 먹은 다음에 배가 살살 아파오고 변의를 느끼게 되었을 뿐이다. 또 회충은 내게서 영양분을 아주 많이 빼앗은 것도 아니라고 한다. 작은 알로 들어와서 그렇게 커다랗게 미끈하게 자라려면 꽤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기생충학자 서민 교수에 따르면 기껏해야 하루에 밥 한 술 정도라고 한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시절이라면 억울했겠지만 요즘엔 아무 것도 아니다.

기생충이라고 해서 회충처럼 맨눈에 보이는 커다란 생명체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70kg 성인의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 기생하는 박테리아 세포는 39조 개나 된다. 사람 몸에는 자기 세포보다 외부 세포가 1.3배나 많은 것이다. (사람 몸에 기생하는 미생물 세포가 10배나 많아서 100조 개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1972년의 잘못된 어림셈이 정설처럼 널리 퍼진 것이다.) 체중의 1~3%는 박테리아 무게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 몸에 사는 미생물은 대부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건강을 지켜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대사과정에 구체적으로 관여한다. 우리가 섭취한 음식과 약물이 우리 몸에 어떻게 작용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비만, 아토피, 당뇨는 몸속의 미생물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장내 미생물이 행동과 기분 같은 정신건강에도 관여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몸에 기생하는 미생물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지구에 살면서 지구를 내 맘대로 다루는 것처럼 말이다.

공생과 기생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 어디까지가 공생이고 어디부터 기생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기생충이 기생충으로 살아남으려면 최소한의 염치가 있어야 한다. 숙주의 입장에서 볼 때 기생충이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한다. 영화 소재로도 사용된 연가시처럼 숙주 곤충의 뇌와 신경마디를 지배하고 결국은 숙주생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생충이라면 박멸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은 입가를 조금 귀찮게 하는 헤르페스 정도면 참아주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천연두는 박멸시켜버렸다.

기생충에게 고한다. 우리는 기생충을 초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찾아왔다. 우리는 관대하다. 같이 살 수 있다. 나눠줄 수 있다. 기생충은 염치는 없을지언정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참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생하는 하나의 생태계다. 당연히 기생충 같은 사람이 널려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기생 역시 공생과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무릇 생태계라면 기생충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기생충이 기본자세를 갖춰야 한다. 사회의 기생충 역시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숙주와 다른 기생충에 관대해야 한다. 톨레랑스는 톨레랑스를 보이는 자들에게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환경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사회 기생충에게서 공생의 탈을 벗겨야 한다. 우리는 박멸시키겠다고 마음먹으면 한 순간이다.

이제 하룻밤만 자면 빛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볼 수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어떤 성찰을 하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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