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36.5℃] 아픔이 길이 되지 못한 장자연 사건

입력
2019.05.28 04:40
30면
0 0

※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경찰 관계자가 조선일보 사장의 통화내역 조사에 대해 증언한 재판 기록.
경찰 관계자가 조선일보 사장의 통화내역 조사에 대해 증언한 재판 기록.

지난해 7월 중순쯤, 뙤약볕이 내리쬐던 오후였다. 서울 청담동의 Y레스토랑에서 어렵게 그곳 사장 고모씨를 만났다. 고씨는 “예뻐하는 동생”이라며 고(故) 장자연씨를 소속사 대표에게 소개한 인물. 2007년 코리아나호텔 방용훈 사장 등이 장씨를 처음 만난 자리에도 함께 있었다. 수사ㆍ재판기록을 보면, 고씨는 장씨와 매일 만나는 사람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사건의 내막을 잘 알 것 같은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짜증을 냈다. 그가 승용차에 오르기 전까지 쫓아가며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답변한 것은 “검찰이나 경찰 조사 받은 적 없다”는 것뿐이었다. 수사기관이 증거를 확보한 후 신문해도 진실을 말할까 말까 하는 상황에서, 아무 강제권 없는 기자의 질문은 우습기만 했을 것이다.

작년 장자연 수사ㆍ재판 기록을 구해서 우선 보도한 후, 후속 취재는 번번이 막혔다. 파편화된 조각들은 많지만 전체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고, 두 명 중 누가 거짓말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검찰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핸드폰 통화내역을 추적할 때 처음에 일주일치만 조회하도록 지휘했다는 폭로가 있다. 통화기록 조회는 보통 1년치를 한다. 당시 수사팀에 있었던 이모 총경은 “왜 (2008년 9월) 11~17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사님과 판사님은 그 정도면 된다고 판단했다”(2011년 10월 10일 서울중앙지법 증인신문조서)고 말했다. 이후 9월 한달 치로 기간을 넓히게 됐으나, 그 과정에 대해서 이 총경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2008년 9월은 장자연씨가 문건에 조선일보 사장에게 접대를 강요 받았다고 명시한 시점이다. 당시 박모 검사(현 변호사)에게 물었다. “경찰이 신청한 통신영장 내용 그대로 청구한 것이다. 경찰이 착각한 것 같다”고 했다. 검찰 입장을 이 총경에게 전했더니 그는 “검찰 얘기는 우리가 알아서 일주일치만 올렸다는 건가? 아니다. 우린 다 1년치를 한다. 왜 줄여서 하겠나”고 했다.

장씨 주변인들의 순수성도 늪에 빠졌다. 소속사 동료였던 윤지오씨의 발언과 그에 대한 지지, 이후 신빙성 논란은 씁쓸함을 남긴다. 최근에는 장자연씨의 전 남자친구가 10년만에 인터뷰를 하고 윤씨를 비난했다. 그는 “윤지오씨라는 분은, 그 상황을 겪지도 못했으면서 마약, 성폭행, 성 접대, 술 시중 등 자연이에게 치명적인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며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했다.

이 남친은 어떤가. 둘은 장씨가 사망하기 한달 전 헤어졌고, 그 남친의 어머니는 장씨가 숨지기 일주일 전 1,000만원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장씨 수사기록에는 통화녹음 된 남친 어머니와의 대화가 나온다. 남친의 어머니는 “(약속했던 6월보다) 당겨서 주세요” “친구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돈을 구)해봐”라고 계속 장씨를 압박한다. 장씨는 “제가 ○○(남친)한테 강제로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자기가 더 해줘서 빌려 준거였는데” “제가 6월까지 약속 했는데 계속 이러시면 저도 곤란해요” “제가 곧 회사를 옮기면 계약 받으니까 드릴게요”라고 했다가 독촉이 이어지자 “오늘부터 나가서 사람들한테 구걸을 해서라도 빌려 보낼테니까요”라고 한다. 이에 남친의 어머니는 “구걸을 해서 보내요”라고 말한다.

장자연 사건이 10년 지나도록 국민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이유는, 그 고통과 아픔의 끝에서 우리 사회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공장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나 음주운전으로 친구를 잃은 젊은이들은 앞장서 제도를 진전시키며 티끌만한 위안이라도 얻지만, 장씨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가해자들이 승자이다.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주요 의혹에 대한 수사권고 없이 소득 없는 결론으로 끝났고, 검경은 직무유기를 하고도 스스로에게 면책권을 줘 가며 사과조차 않는다. 지금 다시 장자연 사건이 발생한다 해도 결과가 과연 다를 수 있을까.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