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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야반도주 한인기업 사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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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야반도주 한인기업 사태’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19.05.21 17:26
수정
2019.05.21 18:2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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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B, 석달치 체불임금 74% 지급… 한달 최저임금보다 적은 16만원

노동자들 “미지급금ㆍ퇴직금 60억원, 일본 기업들은 법 지키는데…”

지난 13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야외 식당에서 한 SKB 노동자가 아기를 품에 안고 시름에 잠겨 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지난 13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야외 식당에서 한 SKB 노동자가 아기를 품에 안고 시름에 잠겨 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회사가 생길 때(1991년)부터 28년 일했습니다. 할머니가 됐어요. 7개월을 기다렸는데 200만루피아(16만원)를 쥐어주고 떠나랍니다. 퇴직금은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이게 공정한가요?”

카스마보티(52)씨의 물음에 ‘그래도 3개월치 체불임금(사실은 원래 금액의 74.5%)을 받았으니 된 거 아니냐’고 기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한국인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고 야반도주한 인도네시아 봉제업체 ㈜에스카베(SKB) 직원들에게 돈이 지급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지난 13일 다시 공장을 찾은 참이었다.

회사 마당 야외 식당을 지키던 노동자들은 “한국 정부가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기자를 반갑게 맞으면서도 “그러나 이제 모두 발을 빼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19년을 일한 데리야(39)씨는 “사장 김모씨가 보낸 돈은 자동적으로 온 게 아니다. 더 지급해야 할 돈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카르타 한달 최저임금(32만7,000원)에 못 미치는 2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받고 공장을 떠나야 하는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아이들은 풀 죽은 엄마 곁을 지키고 있거나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가벼운 맘으로 갔다가 무거운 고민을 안고 돌아왔다.

지난 13일 바깥에서 들여다 본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내부. 출입 금지된 지 5개월이 지났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지난 13일 바깥에서 들여다 본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내부. 출입 금지된 지 5개월이 지났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그리고 20일 오전 SKB 노동조합은 작년 8~10월분 체불임금이 SKB 노동자 4,419명에게 이날 부로 지급됐다고 알려왔다. 김씨 측 변호인도 지급 총액이 79억6,382만루피아(6억5,780만원)라며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줬다. 20번 가까이 협의한 끝에 도달한 결과다. 김씨 변호인은 “총 송금액수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하고 남은 72만원 가량은 김씨와 상의해서 사용처를 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3월 7일 한국일보 첫 보도에 이은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 공조 지시 뒤 두 달여 만에, 당초 제기했던 체불임금 문제는 해결됐다고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주재 한국 대사관, 재인도네시아한인상공회의소(KOCHAM) 등 현지 한인 사회가 노력한 성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이 없었다면 노동자들은 한 푼도 손에 쥐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르바란(우리나라의 설 명절 같은 라마단 뒤 장기 연휴) 전에만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노동자들의 소망도 액면상으로는 이뤄졌다.

지난 13일 찾아간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야외 식당 전경. '언제 내 월급을 돌려줄 것인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지난 13일 찾아간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야외 식당 전경. '언제 내 월급을 돌려줄 것인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우선 사장 김씨가 송금한 돈은 3개월치 월급을 다 지급하기엔 부족해 이번에는 줘야 할 돈의 74.5%만 지급됐다. 1인당 15만원 가량으로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최소 보상금(80여만원)의 5분의 1도 안 된다. 게다가 SKB 노동자들은 체불임금 외에도 수년간의 임금 미지급분과 퇴직금이 60여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들 주장이 맞다면 정당한 노동 대가의 9~10%만 지급됐다는 얘기다. 지난 6일 현지 법원이 SKB에 대해 파산 선고를 내렸기 때문에 공장 설비를 처분하는 등 청산 절차가 마무리되어야만 노동자들이 더 돌려받게 될 돈의 규모가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최저임금 인상으로 가뜩이나 어려움에 처한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 기업들, 열심히 하고 있는 업체들의 이미지마저 실추시키고 있다”는 현실론도 살펴야 한다. 다만 “강성 노조가 개입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더 줄 돈이 없으니 3개월치 받으면 (김씨에게) 일체의 책임을 묻지 말라고 요구했다” 등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사건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기업가 정신은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노동자 측 변호사인 아데(43)씨가 물었다. “한국도 체불임금이 많다고 들었다.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왜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끌려 다녀야만 하는가?” 수산(41)씨가 말했다. “좋은 한국 기업도 많다. 그런데 나쁜 한국 기업은 어떻게든 일은 많이 시키고, 돈은 적게 주려고 한다. 일본 기업은 좋고 나쁜 거 없다. 그냥 법을 지킨다.”

지난 13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야외 식당에서 SKB 노동자들이 모여 앉아 체불임금 수령 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지난 13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에스카베(SKB) 공장 야외 식당에서 SKB 노동자들이 모여 앉아 체불임금 수령 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그래서 이번 SKB의 체불임금 지급은 사태의 ‘일단락’일 수 있지만, 긴 싸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절반의 성공, 미완의 절반을 완성하기 위한 기다림이다. 13일 두 시간 가량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떠나는 길, 엄마에게 달라붙은 소녀의 눈망울이 한참이나 기자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체불임금은 개인을 넘어 한 가정을 파괴한다.

이번 사건은 자카르타 시내에서 동쪽으로 20여㎞ 떨어진 브카시 소재 봉제업체 SKB 사장 김씨가 지난해 10월 직원 4,000여명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잠적하면서 불거졌다. 인도네시아에선 노동부 장관이 직접 이 문제에 관여할 만큼 파문이 컸다. 3월 7일 한국일보 보도로 국내에 알려진 뒤 문 대통령은 외교부 등에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적극 공조를 지시했다. 현재 김씨는 한국에 거주 중이며 경찰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 송환을 피하기 위해 돈을 보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는 아직 책임질 일이 많다. 그것은 비단 돈 문제뿐만이 아니다.

브카시=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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