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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3대째 내려온 처방전이 가보… 환단 만들기 체험 행사로 한방 대중화

입력
2019.06.15 04:40
수정
2019.06.15 16:0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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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대구 약전골목 중앙한약방

박재규(오른쪽) 대구 중앙한약방 2대 원장이 아들인 박신호 대표에게 설립자인 고 박성환 원장이 각종 의약서를 요약해 직접 손으로 쓴 책자를 펴 놓고 중요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박재규(오른쪽) 대구 중앙한약방 2대 원장이 아들인 박신호 대표에게 설립자인 고 박성환 원장이 각종 의약서를 요약해 직접 손으로 쓴 책자를 펴 놓고 중요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대구 중구 약전골목은 한의약 관련 업소가 밀집한 대구의 대표적 특화 거리다. 이 골목은 한방산업의 침체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가는 곳이다. 중구 남성로 약령동문에서 서쪽으로 약령서문까지 약 700m 도로 양쪽은 물론 계산동 종로 장관동 수동 등 인접 지역의 이면도로엔 한약방과 한약업사(한약재판매점), 제탕원, 인삼사, 한의원 등이 성업 중이다. 대구 중구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이 지역에만 약업사 74곳, 한약방 26곳, 제탕원 30곳 등을 포함해 183개의 한의약 관련 업소가 몰려 있다.

약전골목은 약령시에서 시작했다. 약령시는 조선 효종 9년(1658년) 대구감영(현 경상감영공원) 객사 부근에서 매년 음력 2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 달씩 한약재를 거래하는 계절시장이었다. 1906년 경북도관찰사 대리인 악질 친일파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허물었고 약령시도 이듬해부터 원래 자리에서 남쪽인 대구읍성 남문 밖의 현재 위치인 남성로로 옮겼다. 이때부터 이 거리는 약전골목으로 불리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대구 중앙한약방. 김문중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대구 중앙한약방. 김문중 기자

조선시대 약령시는 대구 전주 원주가 유명했는데 이중에서도 대구가 가장 번창했다. 대구는 조선시대 경상좌우도의 감영 소재지로 행정과 교통의 중심이었다. 주변에 약재 생산지도 많았다. 소백산맥 일대와 영주 풍기의 인삼, 군위의 생지황, 영천의 천궁, 낙동강유역인 다산면 일대의 향부자, 의성의 작약 등은 지금도 유명하다. 전국의 한약재가 모이기 시작한 이 일대는 대구 최대 번화가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박재규(87) 중앙한약방 2대 원장은 “함경도에서 난 약재도 대구 약전골목 바람을 쇠지 않으면 약효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며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 ‘택사’라는 약재와 전라도의 산수유 같은 게 중국이나 일본, 대만 등으로 많이 수출됐는데 중간 경유지가 대구 약전골목이었다. 대구의 북성로와 함께 많은 돈이 돌던 곳이니 만큼 당시 영남에서 내로라 하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엔 계절성 약령시가 금지됐다. 대신 한약방과 유통업자들이 가게를 상설 운영했다. 광복 후 재개된 계절성 약령시는 한국전쟁 이후 중단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한의약 관련 서적 상당수가 한글화했지만, 당시엔 대부분 한자로 기록돼 있었다. 당연히 ‘글’을 알아야 약을 취급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한의약 종사자들의 민족의식도 남달랐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오랜 역사만큼 이 골목엔 지금도 100년을 바라보는 노포가 제법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노포가 중앙한약방이다. 중앙한약방은 한학을 했던 고 박성환 1대 원장이 약전골목 한가운데 열었던 100년 가게다. 전성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급성장중인 세계 한의약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게 이 한약방의 미래 비전이다.

중앙한약방에서 사용 중인 약탕기.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에서 사용 중인 약탕기.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 외부 전경. 큰길 가에서 몇m안쪽의 다소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 외부 전경. 큰길 가에서 몇m안쪽의 다소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은 약령시한의약박물관과 성내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동쪽으로 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2층 건물이지만 바닥면적이 100㎡도 안 되는 작은 건물이다.

최근 중앙한약방을 찾아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특유의 한약재 냄새가 둘러보지 않아도 한약방임을 알려주었다. 현관 좌우 창가엔 줄줄이 놓인 약탕기가 손님을 맞이했고 약방 안쪽엔 약장과 빛 바랜 의서, 옛 처방전 등이 가득했다. 정면 벽에 걸린 액자 속의 초대 고 박성환 원장과 2대 박재규(87) 원장, 그리고 현재 박신호(54) 대표 등의 사진과 각종 자격·면허증, 인허가증 등이 100년 가게의 역사를 가늠케 했다. 중앙한약방의 역사는 초대 원장이 20살 때 고향(예천)을 떠나 대구의 유명 한약방에서 사사를 받기 시작한 1926년부터 시작, 올해까지 93년째 성업 중이다.

의자에 앉아 의서를 들여다보던 박재규 원장은 “지금은 약전골목 큰길에서 비껴난 골목길에 있지만, 한때 저쪽(약전골목 주도로)에 집이 다섯 채나 있을 정도로 잘 나갔다”며 “빌려준 돈 대신 인수한 것이지만 본업 대신 신용금고(현 저축은행)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운영하다 문제가 생기면서 이렇게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먼저 상담실 바로 옆에 자리한 ‘작은 중앙가족박물관에서부터 한약방의 이력을 소개해 나갔다. 박 원장의 차남인 박 대표가 2010년 남은 한방 관련 기록과 자료를 모아 꾸며 놓은 곳이다. 초대 원장이 남긴 옛 처방전과 필사본 의서, 주요 의서 요약집, 약장, 한약저울, 약을 빻는 주발, 초대 원장이 직접 쓴 병풍 등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면에는 한약재로 썼다는 실물 거북 박제도 눈에 띄었다. 박 원장은 “여기 있는 이 처방전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며 “선친께서 개별 환자의 특성에 맞게 약재의 종류와 복용기간, 양 등을 자세하게 정리해 하나의 한방의약서”라고 설명했다.

중앙가족박물관에 전시 중인 약탕기와 화로, 약첩.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가족박물관에 전시 중인 약탕기와 화로, 약첩.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사향 등 귀한 약재를 갈거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한다는 기구.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사향 등 귀한 약재를 갈거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한다는 기구.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박 원장은 “선친께서 스무 살 되던 해, 약전골목의 거상(巨商) 김홍조 약방에서 1926년부터 사사를 받다 2년 뒤 천안당한약방을 개설해 식구를 먹여 살렸다”며 “큰 돈은 벌지 못했던 것 같고, 태평양전쟁과 해방, 한국전쟁의 혼돈기를 거치며 사정이 어려워져 개점휴업상태에 내몰린 것을 내가 1956년 새로 중앙한약방이란 이름으로 열었다”고 전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가업을 이어온 그는 “선친께선 약 처방에 주력했다. 난 큰 돈을 벌고 싶었다. 현재 경희대한의대의 모체인 동양의학전문학원 1회 졸업생인데, 당시에 유일하게 한의사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졸업생이다. 진맥하고 침 놓고 하는 게 내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이력을 소개했다. 이어 “부산 피난 시절 미군 노무자부대에 끌려가 군번도 없이 2년 복무 후 우여곡절 끝에 졸업했고, 크게 하려고 탄광 막장생활까지 하면서 밑천을 마련해 한약재 유통업 중심의 한약방을 운영했다”고 말했다.

중앙한약방은 승승장구했다. 박 원장은 “한약방에 경비원을 둬야 할 정도로 잘 됐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투자했던 금융사업에 차질이 발생했고 이 문제 해결에 전재산을 처분하다시피 했다”며 “그래도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 하지 말라’는 선친의 가르침은 지켰다”고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설명했다. 약방도 큰 골목에서 현재 중앙한약방의 자리인 뒷골목으로 옮겨야 했다.

큰 일을 겪었지만, 한의약발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한약재도매시장 설립 주도와 함께 약령시보존위원회 초대회장 역임 등 약령시 보존과 발전에 필요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박재규 대구 중앙한약방 2대 원장이 중앙가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유물의 내용과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박재규 대구 중앙한약방 2대 원장이 중앙가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유물의 내용과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에 또 다시 먹구름이 밀려온 건 2009년이다. 한의사인 큰아들 박수호 원장이 유명을 달리한 가운데 삼남인 박신호 대표가 갑자기 가업을 잇게 되면서부터 찾아왔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차남은 한약과의 거리가 멀었다. 직장 또한 보험사와 정보기술(IT) 분야에 다녔다. 그는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뒷수습을 위해 서울서 대구로 왔다. 가업을 이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무렵엔 부친께서 가업을 이을 것을 ‘명령’했지만 3년6개월간 일본에서 도피생활을 하다시피 했다”고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랬던 그가 인생의 궤도 수정에 나서기로 마음 먹은 건 뜻밖에도 집안의 ‘가보’를 발견하고 나서부터라고 했다. 형의 유품 가운데 조부 때부터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해 온 처방전과 의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신호 대표는 “일본에 갔을 때, 도쿄대 등 명문대 출신들이 번듯한 직장을 내던지고 가업을 잇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었다”며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마음이 바뀌었고 별세하신 할아버지와 형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업 승계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외부환경이 녹록치 않았다. 약령시는 갈수록 쇠퇴했고 돈벌이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한약은 사양산업으로 취급을 받았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2011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렸던 여름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개점하면서 인근에 위치했던 약전골목 한방업소의 임대료도 급증했다. 다행히 자가 건물에 자리했던 중앙한약방이 임대료 폭탄을 피할 순 있었지만 갈수록 악화된 한약계의 위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한약업 활성화를 위한 해법 찾기에 골몰했고 ‘가족박물관’ 개관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의 전통을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 그것은 조부께서 남기신 서적에 있었다. 의서를 손으로 옮겨 적은 것도 있고, 처방전을 보기 좋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우리집의 유품을 남들이 보기 좋게 꾸며 놓았으니 ‘가족박물관’이라고 칭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학초단만들기 체험 참가자들이 중앙한약방 2층 체험장에서 만든 학초단을 들어보이고 있다. 중앙한약방 제공
학초단만들기 체험 참가자들이 중앙한약방 2층 체험장에서 만든 학초단을 들어보이고 있다. 중앙한약방 제공
학초단만들기 체험 참가자들이 직접 만든 학초단을 들어 보이고 있다. 중앙한약방 제공
학초단만들기 체험 참가자들이 직접 만든 학초단을 들어 보이고 있다. 중앙한약방 제공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등 온라인 마케팅도 적극 활용했다. 몇 년 전부터는 환단만들기 체험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녹용과 당귀, 산수유, 침향 등의 재료를 활용한 ‘학초단 만들기’ 체험이 대표적이다. ‘학초단’의 학초는 박 대표의 조부 호에서 따왔다. 침향 대신 고가의 사향을 쓰는 공진단엔 못 미치지만 효능은 비슷하다. 재료 값이 만만치 않지만 체험료는 1회 10알에 7만원으로 정했다. 주변에서 ‘미쳤다’는 소리도 듣곤 하지만 효능이 별로인 저품질로 고객 확보에 나설 순 없다는 게 박 대표의 생각이다. 식품이다 보니 일반인들도 직접 만들기 체험이 가능하다.

입소문도 탔다. 박 대표는 “일본 대만 등 외국인들이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일반적인 한약재 유통이나 약 처방이 가지는 한계를 직접 만들기 체험 등으로 극복하는 한편 한방의 대중화까지 이끌어 보고 싶다”고 했다. 중앙한약방은 2층에 환단만들기 체험장을 마련했고 기업 워크숍장소 등에서의 출장체험서비스도 제공 중이다.

중앙가족박물관에 전시 중인 처방전. 초대 박성환 원장이 남긴 것이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가족박물관에 전시 중인 처방전. 초대 박성환 원장이 남긴 것이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 내부에 한약재를 볶을 때 사용한 프라이팬이 눈길을 끈다. 잔쯕 녹이 쓴 프라이팬 내부, 주걱 끝이 뭉툭하고 테이프를 칭칭 감은 손잡이가 이채롭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한약방 내부에 한약재를 볶을 때 사용한 프라이팬이 눈길을 끈다. 잔쯕 녹이 쓴 프라이팬 내부, 주걱 끝이 뭉툭하고 테이프를 칭칭 감은 손잡이가 이채롭다.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가족박물관에 전시 중인 약저울.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중앙가족박물관에 전시 중인 약저울. 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박 대표에겐 고민도 남아 있다. 당장, 중앙한약방을 이어갈 후대가 불투명해서다. 박 대표의 자녀들은 한의약엔 전혀 관심이 없다. 박 대표는 “한의약 활성화는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며 “국내외 박람회 등도 수시로 참관하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중앙한약방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 무엇보다 한의약 대중화를 위한 저변확대에 주력하겠다”며 대구 약전골목의 역사 이어가기를 약속했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매년 약 8%씩 성장세인 세계 한의약시장 규모는 2050년엔 5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대구=정광진 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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