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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정의라면, ‘어벤져스’ 보다 ‘배심원들’처럼

입력
2019.05.1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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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영화 '배심원들'에서 배심원들의 상의하는 장면. 법 전문가의 냉철한 판단보다 소시민의 건전한 상식이 재판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지 보여준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배심원들'에서 배심원들의 상의하는 장면. 법 전문가의 냉철한 판단보다 소시민의 건전한 상식이 재판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지 보여준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또야?”

늦은 밤 거실에 누워 맥주 한 캔 따고 멍 때리는 시간. 습관적으로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볼 때 아내가 던지는 한마디다. ‘현실성이라곤 없는, 애들이나 볼 것 같은 저런 이야기가 재미있냐’는 뜻일 게다. 애가 좋아해서 본다는 핑계라도 대보려 아들을 꼬드겨보기도 했는데 이 녀석, 아직은 장대한 스토리가 버거운 모양이다. 몇 장면 빼놓곤 금세 딴청이다. 하기사 나도 어릴 적 책으로 봤을 땐 황당하기만 했으니 아들을 탓할 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내가 보는 건 극장 개봉판에서 편집된 부분을 다 살려낸, 편당 4시간 안팎 되는 감독판이니 무리다 싶기도 하다.

‘반지의 제왕’을 자주 보는 건 행복해서다. 엘프니 뭐니 하는 잘 생기고 머리 좋고 귀족적인 정의의 화신이 아니라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만인, 그저 담배와 술을 즐기는 소심한 겁쟁이 농부 호빗 족이 이 세계의 구원자라는 설정이 그 얼마나 신나는가 말이다. 더구나 절대반지를 불의 산 용암에 던져 넣어 파괴해야 할 마지막 그 순간, 프로도마저 배신하지만 골룸이 의외의 활약(?)을 펼쳐 성공한다는 설정은 또 어떤가. 전체 스토리나 주제 의식에 딱 맞아 떨어지는,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결론인가.

왜 하필 호빗에게 희망을 거느냔 질문에 마법사 간달프는 이 세상을 구하는 건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사소한 친절”이라 답한다.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건 영웅ㆍ정의ㆍ논리ㆍ명분 때문이 아니라 차마 그러지 못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우연들 덕이란 뜻이다. 고 신영복 선생이 그랬던가. 옥살이하고 나와보니 한 시절 운동했다는 잘난 이들은 어디선가 한 자리씩 찾아 잘 살고 있는데, 그 시절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던 이들만큼은 차마 떠날 수 없어 운동의 자리, 그 곳을 계속 지키고 있더라고. ‘반지의 제왕’이 판타지이면서, 판타지를 넘어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 '반지의 제왕' 포스터. 가장 약하고 작은 존재인 호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영화 '반지의 제왕' 포스터. 가장 약하고 작은 존재인 호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신영화 챙겨보는데 무척 게으른 편임에도 영화 ‘배심원들’을 부러 찾아본 건 그 때문이다. 영화의 뼈대는 임대 아파트에 사는 비호감 장애인이 제 어미를 죽였다는 사건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압축적으로 옅보이지만, 영화는 그보다 2008년 국민참여재판 도입 초기 배심원들의 평결 과정을 좇아간다. 자백사건이라 수사가 허술한 검찰, 전문가 증언에 의존해 안이하게 판단하려는 법원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쯤이면 영화의 얼개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영화 보는 내내 포만감이 들었던 건 8명의 배심원들이 ‘반지원정대’, 그것도 ‘프로도들’로만 구성된 반지원정대 같아서였다. 크건 작건, 처음엔 없다 나중에서야 발견해내든 ‘차마 그러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닌 이 프로도들은 하나하나 의심을 키워가다 나중에 가서는 한결같이 외친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다’는 소시민의 작은 몸짓이 한 사람을, 가정을 구원해낸다. 그래서 배심원 8명의 ‘밀당’ 과정을 지켜보는 게 너무나 흐뭇하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판타지라면, 성조기를 상징하는 방패 휘두르는 무적군인과 철갑 두르고 하늘을 나는 회장님의 초인적 무용담보다는 훨씬 더 나은 판타지 아닐까.

영화 ‘어벤져스’ 포스터. 슈퍼 초인들의 결사체다.
영화 ‘어벤져스’ 포스터. 슈퍼 초인들의 결사체다.

검ㆍ경 수사권 조정, 공수처 도입 등 검찰 개혁 문제를 두고 연일 신문지면이 소란스럽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전과 달리 이제 ‘수사기관 들쑤셔놓으면 웃는 건 정치권’이란 식의 ‘거악척결’ 논리는 쏙 들어가버렸다는 점이다. 아마 ‘거악은 너희 자신’이란 비판을 의식해서이리라. 제도 개혁이 모든 것을 대신 할 순 없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우리가 법은 잘 안다’는 고집보다 ‘우리도 잘 모르겠다’며 망설이는 몸짓이 더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 정의란, 목표를 향한 시원한 질주보다 비틀대며 걸어가는 과정 자체일 테니까.

조태성 사회부 차장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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