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민주당 당직자들이 해머를 휘두르며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 측은 회의장 안에서 출입문을 걸어 잠근 채 한미FTA 비준안 상정을 시도했다. 오대근 기자
지난달 29일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열릴 것으로 예고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장 앞 복도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드러누워 길을 막자 이정미 대표 등 정의당 의원들이 피켓을 들고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황교안 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열린 비상의원총회에서 패스트트랙을 반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배우한 기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둘러싸고 국회에선 원색적 비방과 폭력이 난무했다. 국회가 이처럼 갈등과 대립의 장으로 변질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의원들의 손에 피켓과 현수막이 들리기 시작했고 양보 없는 극한 대치는 말싸움을 넘어 연장을 동원한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국회에서 포착된 결정적 장면마다 등장하는 각종 도구들엔 우리 정치의 부끄러운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피켓 

간단명료한 문구로 의사를 표현하는 피켓은 집회나 기자회견 등에서 자주 쓰이는 시위 도구다. 한국일보 데이터베이스를 기준으로 의원들이 국회에서 피켓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때부터다. 당시 본회의장 점거 농성을 하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쿠데타 음모’ 등을 적은 손글씨 피켓을 만들어 2층 기자석에서 잘 보이도록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후 정치권 대립이 일상화하며 피켓 출현 빈도가 꾸준히 높아졌고 표현은 원색적으로 변했다. 이번 패스트트랙 사태에서도 일방적이고 자극적인 문구의 피켓이 홍수를 이뤘다. 자유한국당은 ‘좌파독재반대’ ‘선거법날치기’ 등이 적힌 피켓을 들어 반대 의사를 나타냈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은 ‘발목잡기 이제 그만’ ‘정치개혁은 국민의 명령’ 등의 피켓으로 맞대응했다.

 ◇현수막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지난달 29일 패스트트랙 강행 처리에 항의하며 ‘문재인 독재자 오늘 민주주의는 죽었다’라고 쓴 현수막을 덮고 누웠다.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 시정연설 때는 국정운영에 반발하는 대형 현수막을 펼치기도 했다. 내용의 진위와 상관없이 현수막에 적힌 문구는 수많은 언론 매체를 통해 사진 또는 영상으로 가감 없이 보도됐다. 현수막의 이 같은 메시지 전달 효과를 활용한 사례는 적지 않다. 2006년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비롯해 사학법 개정안, 예산안 삭감 등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국회 본회의장에 수시로 내걸렸다. 정당을 막론하고 장외투쟁에 나서면서 의사당 앞 계단에 대형 현수막을 펼치는 일 또한 익숙해졌다.

나경원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검찰 개혁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직후 항의의 뜻으로 사법개혁특별위원회 회의장 앞에 드러누워 있다.
2017년 11월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대형 정부 정책에 반발하는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오대근 기자
2013년 11월 18일 법무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로 해산 위기에 몰린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마스크를 쓴 채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대근 기자
 ◇마스크 

침묵이 때론 수백 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침묵하고 있음’을 이미지화하려면 마스크라는 도구가 필수다. 2013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들은 ‘민주’라고 적힌 마스크를 쓴 채 침묵시위를 벌였다. 법무부가 통진당을 종북정당으로 결론짓고 위헌정당 해산심판을 청구한 데 대한 강력한 항의의 표현이었다.

 ◇헌법전 

2006년 12월 국회 본회의장 앞에 새로운 도구가 등장했다. 당시 전효숙 헌재소장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던 한나라당 측이 본회의장 출입문 앞에 헌법전을 쌓고 ‘헌법을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유인물을 얹어 놓았다. 물리적으로는 넘을 수 있지만 헌법의 가치는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는 심리적 바리케이드였다. 결국 임명동의안 처리는 무산됐고 전 후보자는 자진 사퇴했다.

2006년 12월 18일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한나라당 측이 쌓아 둔 헌법전과 유인물을 치우며 국회 본회의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당시 본회의장에선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점거농성이 진행 중이었다. 신상순 기자
국회 방호과 직원들이 지난달 26일 새벽 자유한국당이 점거 중인 의안과 사무실로 진입하기 위해 빠루를 이용해 출입문 개방을 시도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2008년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민주당 당직자들이 해머를 휘두르며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ㆍ오대근 기자
 ◇연장(해머와 빠루) 

여당의 표결처리 강행과 야당의 저항은 번번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회의장 점거와 봉쇄, 탈환의 혼란 속에서 철거용 연장까지 동원됐다. 지난달 26일 의안과 문을 열기 위해 방호과 직원들이 사용한 빠루(노루발못뽑이)도 그중 하나다.

빠루의 등장은 잊고 있던 해머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 12월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상정하기 위해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밖에 있던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이 해머로 문을 부수며 진입을 시도하자 한나라당 측이 이들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하면서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공중부양 

2009년 1월 강기갑 당시 민노당 대표는 여당의 미디어법 개정안 상정에 반발하며 국회 사무총장실을 찾아가 거칠게 항의했다. 탁자를 내리치고 발을 구르는 과정에서 그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가 항의에 사용한 도구라곤 맨몸뿐이었지만 ‘공중부양’은 그 어떤 도구보다 폭력적인 사례로 남았다.

2009년 1월 5일 여당의 미디어법 개정안 상정에 반발해 농성 중이던 강기갑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박계동 사무총장실에서 국회의 당직자 강제 해산에 항의하며 탁자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최흥수 기자
김선동 전 민노당 의원은 2011년 11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시도하던 정의화 국회부의장을 향해 최루탄 분말을 투척했다. 그 직후 의장석 주변이 아수라장이 됐다. 오대근 기자
 ◇최루탄 

웬만한 액션영화 못지 않은 국회 내 폭력사태는 2011년 11월 본회의장 최루탄 투척 사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민주노동당 김선동 전 의원은 한미FTA 비준안 처리를 시도하던 정의화 국회부의장을 향해 최루 분말을 뿌렸다. 이 사건은 김 전 의원의 의원직 박탈과 함께 국회 내 폭력행위를 금지하는 국회선진화법 도입의 계기가 됐다.

그러나 8년만에 국회는 또다시 회의 방해와 감금, 점거와 몸싸움으로 얼룩졌다. 8일 기준 패스트트랙과 관련해 국회선진화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의원은 97명에 달한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그래픽=강준구 기자 wldms4619@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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