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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오스만 유럽 침공의 ‘나비 효과’... 벼랑 끝 신교도 기사회생

입력
2019.05.04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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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오스만 제국, 종교개혁운동의 운명을 바꾸다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율리우스 휘브너의 그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에 95개 반박문을 붙이는 마르틴 루터’(1878).
율리우스 휘브너의 그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에 95개 반박문을 붙이는 마르틴 루터’(1878).

사소한 행위가 전혀 예상치 못한 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나비 효과’라고 부른다. 원래 이 용어는 정확한 날씨 변화나 주가 변동을 예측하기 힘든 이유를 설명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도 가끔 나비 효과처럼 원인과 결과가 필연인지 우연인지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가끔 나타난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 이후 유럽은 가톨릭교회 중심의 질서체제를 지키려는 구교도와 이를 해체시키려는 신교도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아주 우연히도 바로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유럽을 침공했고, 그 혼란을 틈타 벼랑 끝 위기에 몰렸던 신교도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박해 앞장선 합스부르크 왕가 

종교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루터와 그를 추종하는 개혁가들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음을 질타했다. 특히 루터는 교회의 면벌부(免罰符) 판매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오직 신의 은총과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고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주장하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유럽 각국에서는 구교도와 신교도 간 신학적, 정치적, 군사적 대립이 지속되었다.

종교개혁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가던 16~17세기 무렵 유럽 내에서 신교도 박해에 가장 앞장섰던 세력은 합스부르크 왕가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6세기 초 카를 5세 시대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종교개혁 직전인 1516년 스페인의 왕으로 등극했으며, 이후 부르고뉴, 네덜란드, 독일, 밀라노, 보헤미아, 헝가리 등 유럽의 약 4분의 1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상속받았다. 1519년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즉위함으로써 유럽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받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 역할을 맡아 왔다. 카를 5세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가톨릭교회의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종교개혁 운동가들로부터 유럽 전역의 질서를 안정시켜야 하는 책무를 떠안게 되었다.

후안 판토야 데 라 크루스의 그림 ‘지휘봉을 든 카를 5세 황제’. 합스부르크가의 전제 군주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신교도를 탄압했다.
후안 판토야 데 라 크루스의 그림 ‘지휘봉을 든 카를 5세 황제’. 합스부르크가의 전제 군주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신교도를 탄압했다.

카를 5세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에 의해 교회가 분열되어 가는 것을 불편한 심기로 바라보았다. 그는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루터에게 입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카를 5세는 루터가 국법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법적 보호를 박탈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칙령에 서명했다. 이를 계기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졌고 마침내 무력 충돌 사태까지 벌어졌다. 1531년 루터파를 지지하는 독일의 제후들은 가톨릭교회의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슈말칼덴 동맹이라고 불리는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맞서 카를 5세는 이듬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켜 뮐베르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더는 신교도 세력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없었다. 유럽 내에서는 루터파 지지 세력이 이미 널리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밖에서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변수가 등장하여 합스부르크 왕국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구교도와 신교도 싸움에 등장한 오스만 제국 

종교개혁의 여파로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던 때는 우연히도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향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시기와 일치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필두로 오스만 제국은 본격적으로 유럽을 향해 영토 확장에 나섰다. 특히 1521년 세르비아 정복 직후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를 놓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군사적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529년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는 2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기상 악화와 군수품과 식량의 부족으로 그는 빈 정복을 포기하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유럽의 신교도에게 지지를 표명한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 그림은 작자미상.
유럽의 신교도에게 지지를 표명한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 그림은 작자미상.

1529년 빈 포위 공격 이래 약 한세기 동안 유럽 전역은 오스만 제국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이 같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종교개혁 시기 동안 구교와 신교를 포함한 당대의 많은 신학자들의 저술과 연설에서도 언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신학자들이 저술과 연설에서 오스만 제국을 언급한 경우는 오스만 제국 자체보다는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상대방을 비방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종교개혁을 지지한 신학자들은 가톨릭교회의 모순을 비판하기 위해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해 상대방을 오스만 제국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와 결부시켰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신교도를 유럽 내부에서 등장한 오스만 투르크라고 몰아 세웠다. 이 논리에 따라 그들은 이슬람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결성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단의 무리에 속한 루터파와 싸워야 할 종교적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영국의 가톨릭교회 추기경이었던 레지널드 폴은 1536년에 저술한 소책자에서 “가톨릭교회로부터 이탈한 기독교 분파가 바로 투르크인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하며, 신교도야말로 유럽 내부에서 등장한 ‘신(新)투르크’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맞서 신교 신학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악행과 타락이 이슬람의 세력 확장을 부추겼고 결국 교회가 개혁되어야만 이슬람이 쇠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특히 루터는 ‘투르크인에 대항하는 군대의 출정 설교’라는 글에서 “성서는 우리에게 두 명의 폭군에 대해 예언해 주었는데, 이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그리스도교를 황폐화하고 파멸시킬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교황과 투르크인을 두 폭군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는 투르크가 칼을 든 외부의 폭군인데 반해, 교황은 말로써 거짓 신을 믿게 하는 영적인 폭군이기 때문에 더 위험스러운 존재라고 경고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구교도와 신교도 

아이러니하게도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협은 신교도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종교개혁운동 탄압에 집중할 수 없었고, 그 덕에 신교도는 한숨을 돌려 세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정반대로 신교도를 지지하는 정책을 적극 펼쳤는데, 이 또한 합스부르크 왕가에 커다란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독일 지역에서 루터파의 권리가 인정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모습. 작자미상
독일 지역에서 루터파의 권리가 인정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모습. 작자미상

오스만 제국이 신교도 지지 정책을 처음 내놓은 것은 루터가 사망한지 6년 후인 1552년 무렵이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술레이만 대제는 독일의 신교 제후들에게 서한을 보내 오스만 제국의 독일 진출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오스만 제국이 독일을 차지할 경우 신교도에게는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도 덧붙였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저지대 국가에 살고 있는 루터파 교도에게도 서한을 보내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술레이만 대제는 이슬람과 루터파가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같은 유일신을 믿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을 적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공통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신교도 지지 정책을 취한 것은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최강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신교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신교도를 우군으로 삼으려 했던 오스만 제국의 바람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출현은 종교개혁운동의 흐름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카를 5세는 유럽 안팎에서 종교개혁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고, 이 같은 부담 때문에 종교개혁운동을 무조건 탄압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1555년에 루터파 진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를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독일 지역에서 루터파는 가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유럽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펼친 군사 원정과 구‧신교도 분열 정책이 역설적으로 구교도와 신교도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고 유럽에서 종교 선택 자유의 초석이 세워지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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