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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짓밟은 ‘유신정권 긴급조치’… 배상 막은 양승태 대법

입력
2019.04.29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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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연된 정의, 시간과 싸우는 사람들] <1> 유신정권 긴급조치 피해자들 

 대학시절 시위 가담한 김정환 시인 2년 옥살이에 취직 불안까지 

 양승태 대법 “긴급조치 위법이지만 배상 책임 없다” 해괴한 논리 

유신헌법 53조와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내려진 2013년 3월 21일 백기완(앞줄 오른쪽 네번째) 통일문제연구소장과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서강 기자
유신헌법 53조와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내려진 2013년 3월 21일 백기완(앞줄 오른쪽 네번째) 통일문제연구소장과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서강 기자

 *서양 법언(法諺) 중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란 말이 있다. 사법제도가 진중한 태도로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실규명의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격언이다. 살인죄 누명을 쓴 피고인이 사형당한 다음에야 진범이 밝혀내면 무엇 하느냐는 뜻이다. 정부의 잘못으로 인한 피해가 수십년 누적되면 재심(再審)으로도 원상복구가 어렵다. 지연된 정의에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사연을 세 차례 걸쳐 돌아본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대통령 명령만으로 국민의 자유ㆍ권리를 무제한 제약할 수 있도록 한 권한)는 숱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 유신헌법으로 국민의 숨통을 조인 지도자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유신시대의 초법적 조치로 겪었던 억울한 옥살이의 피해에 대해 배상받지 못한 이들이 숱하다.

하루라도 빨리 명예를 회복하려는 이들의 앞을 가로 막아 온 것은 과거사 정리에 대한 역대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외면, 사법부의 정치적 판결이다. 특히 양승태 사법부에서 “위헌은 맞지만 배상할 필요는 없다”는 식의 판결이 이어지면서, 청춘을 통째로 날린 이들이 사후에라도 배상을 받을 길은 막혔다.

[저작권 한국일보]유신정권 긴급조치 그래픽=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유신정권 긴급조치 그래픽=신동준 기자

 ◇선배 죽음 애도하다 징역 2년, 강제징집 3년 

“너의 죽음은 승리였기에, 흐르는 피는 강이 되리라. 이제 꽃의 바다를 이루리라.”

1975년 5월 22일 한낮 서울대. 당시 영문과 4학년이던 김정환(65) 시인은 500여명 학생들 앞에 섰다. 한 달 전 박정희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자결한 선배 김상진 열사를 애도하는 시 ‘4월 진혼가’를 낭독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은 추도식을 마치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학교 밖으로 행진했다. 훗날 ‘오둘둘(522) 사건’이라 불린 이 시위는 유신정권이 선포한 긴급조치 9호(유신헌법에 반대하거나 반대운동을 보도하면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에 반대해 일어난 첫 대규모 학생시위였다.

오둘둘 사건에서 정권의 대응은 가차 없었다. 경찰은 강의실까지 샅샅이 뒤지며 시위 가담 학생 300여명을 잡아들인 뒤 사회계열 학생 박원순(훗날 서울시장) 등 56명을 구속했다. 서울대 총장이 사임하고 치안본부장 등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경질될 정도로 정권의 분노는 컸다. 용케 관악산을 넘어 도망갔던 김 시인도 곧 체포됐고 구타당하며 조사를 받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2년 실형이 확정됐다.

김 시인의 고난은 2년의 옥살이로도 끝나지 않았다. 당시 병역법상 6개월 이상 실형을 선고받으면 징집 대상이 아니었지만, 정권은 김 시인을 출소 한 달 만에 군대로 보냈다. 군 생활 3년 내내 사찰을 받아야 했고, 공무원ㆍ공기업ㆍ대기업 취직을 금하는 ‘3불 원칙’ 등 각종 불이익을 겪었다. 유신정권은 김 시인의 청춘을 통째로 파괴해 버렸다.

김 시인이 재심에 나선 것은 2011년에 와서였다. 2년 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판단을 내놓으면서, 유죄 선고 37년 만에 무죄 판결문도 받아 들었다. 그러나 재심 판결 후 신청한 민사소송(국가배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 시인은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결정했다면 국가가 조사해서 일괄적으로 배상을 할 일이지, 지금처럼 피해자들의 개별 소송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긴급조치 9호 피해자인 양춘승(뒷줄 왼쪽 첫번째)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가 1975년 동료 대학생들과 농촌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모습. 양춘승씨 제공
긴급조치 9호 피해자인 양춘승(뒷줄 왼쪽 첫번째)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가 1975년 동료 대학생들과 농촌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모습. 양춘승씨 제공

 ◇간첩 소리에 화병 난 아버지의 죽음 

1977년 3월 28일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이던 양춘승(63)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는 “대학인들이여 잠을 깨라!”로 시작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해 학생 200여명 앞에서 꺼내 들었다. 그러나 몇 줄 읽기도 전에 학생 수만큼이나 많은 사복형사들이 달려들었다. 양 이사는 가까스로 몸을 피해 한 달 동안의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유신정권은 양 이사를 붙잡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을 압박했다. 시위 현장에서 붙잡힌 친구는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대며 “양춘승의 행방을 대라”는 협박을 받았고, 양 이사의 형은 영장도 없이 연행돼 독방에 감금된 뒤 “간첩으로부터 받은 돈은 어디 있냐”고 취조 당했다. 양 이사는 결국 자수했고,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1년6월 실형을 확정 받았다.

그는 구치소에서도 특별 관리를 받았다. 감옥에서 “유신 철폐”를 외치다 징역 1년을 추가로 선고 받은 양 이사는 1979년 7월 제헌절 특사로 가석방될 때까지 2년 3개월 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출소한 양 이사를 기다린 것은 네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아들이 간첩이란 얘기에, 형사들의 집요한 수색과 방문에 화병이 생겨 식사도 제대로 못하다 떠나셨다는 이야기에 양 이사는 통곡했다.

양 이사 또한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판단이 나온 2013년에서야 재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양 이사와 가족들은 곧장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2015년 서울중앙지법은 국가의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 판결에 따라 “긴급조치 9호에 의한 수사 및 재판행위 자체는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했다. 항소심은 관련 사건 판결을 기다리느라 4년째 재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양 이사는 “이 사건은 돈 몇 푼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사법정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1969년 서울대 시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1969년 서울대 시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양승태 대법 “긴급조치 위헌이지만 국가배상 불가” 

사실 긴급조치에 따른 피해 회복 문제는 훨씬 일찍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법원의 수상한 판결이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긴급조치 피해자에 대한 재조명은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판단한 2009년 본격 제기됐다. 이어 2010년 이용훈 대법원이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오종상씨 재심 사건에서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첫 판단을 내렸고, 2013년 긴급조치 1ㆍ2ㆍ9호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 긴급조치 4ㆍ9호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이어졌다. 자연히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뒤따랐다.

그러나 2014년 양승태 대법원은 긴급조치는 위헌이되 국가가 배상할 책임은 없다는 모순적인 판결을 내놨다. “위헌임이 선언되기 전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한 것이 국가의 불법행위는 아니다”라면서 “수사기관의 구체적 위법행위가 있어야 배상할 수 있다”고 했다. 2015년에는 “긴급조치 발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면서 “민주화보상금을 받았다면 배상 받을 수 없다”고 배상범위를 좁혔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의식해 그 아버지인 박정희 유신정권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1974년 서울시민들이 한국일보 속보판에 붙어있는 긴급조치 1, 4호 해제 벽보판을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4년 서울시민들이 한국일보 속보판에 붙어있는 긴급조치 1, 4호 해제 벽보판을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재경지법 부장판사였던 한 변호사는 “가혹행위 여부와 상관없이 손해배상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2014년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도 아닌 소부에서 기존 입장을 뒤집어버려 황당했다”고 상황을 기억하면서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배상하자거나 재판 자체를 미루자는 등 말이 많았다”고 했다.

결국 지난해 불거진 사법농단 의혹에서 양승태 대법원이 이런 이상한 판결을 선고했던 근본적인 이유의 단서가 일부 드러났다. 양 대법원장이 2015년 8월 청와대에서 박 전 대통령을 면담하며 상고법원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고, 긴급조치 배상판결을 국정운영 협조 사례로 든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일단 한번 내려진 대법원 판결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지난해 8월 헌재가 대법원의 긴급조치 배상판결을 취소할 수 없다고 결정하면서, 대법원 스스로 입장을 바꾸지 않는 이상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을 받을 길은 사실상 닫혀 버렸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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