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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기자들이 ‘악마’가 되지 않으려면

입력
2019.04.26 20:30
수정
2019.04.26 21:0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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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동영상 유포 ‘기자 단톡방’ 충격

성범죄 피해자 사진에 외모 품평까지

일탈 낳은 관행ㆍ조직문화 돌아볼 때

불법 촬영물 등을 공유한 '기자 단톡방' 캡처. 미디어오늘 제공
불법 촬영물 등을 공유한 '기자 단톡방' 캡처. 미디어오늘 제공

“기자님은 편파적인 기사를 쓴 적이 있나요?” 얼마 전 김포의 한 마을신문 기자단 교육에 초청받아 강의하던 중 받은 질문이다. 진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묻던 이를 포함해 ‘기자단’ 대부분은 중학생. 더구나 장래희망이 기자인 사람은 전무하고 대개는 사회봉사 점수를 준다기에 엄마에게 등 떠밀려 나왔다고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편파의 정의부터 그런 기사들이 양산되는 원인과 해법까지 논문 몇 편은 족히 쓸 법한 주제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날의 난감했던 경험을 곱씹자니, 전략 업무를 한다며 갈피를 잡기 힘든 ‘미래’를 좇아 부유하던 내 시선이 부끄러워진다. 아이는 ‘편파적인 기사’를 콕 집어 물었지만, 믿을 수 없거나 믿기 어려운 ‘나쁜 기사’가 어디 그뿐인가. 저널리즘의 핵심인 신뢰를 잃고, 더구나 그 신뢰를 회복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외면한 채 운위되는 ‘지속가능한 미래’는 얼마나 공허한가.

철학자 시어도어 젤딘은 저서 ‘대화에 대하여’에서 심하게 비딱한 대화 상대를 이렇게 구분한다. 사악한 행동을 즐기는 ‘뿔 달린 악마’는 어쩔 도리가 없지만, 너무 유약해 위악을 떠는 ‘악마’는 대화를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나쁜 기사(기자)에 대입해 보자. 정치적 목적이나 돈을 노려 작정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뿔 달린 악마’는 당연히 퇴출 감. 문제는 마감에 쫓겨, 게으름 탓에, 낡은 관행에 젖어 결과적으로 나쁜 기사를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과 진실은 뿌리채소처럼 호미질 몇 번으로 쉽게 캐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흩어지고 숨겨진 사실의 파편들을 발굴해 맥락을 읽어내고 진실을 찾아가려면 숱한 시행착오를 견디고 극복하는 단단한 의지와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름길로 보이는 늪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줄 직업윤리도 빼놓을 수 없다. 자칫하다 허방다리를 짚을 수 있고, 부지불식간에 ‘악마’가 될 수 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별 고민 없이 수용해 온 취재 및 기사 생산 관행, 그리고 조직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언론은 한때는 독재정권의 탄압에 짓눌려, 때로는 무한 경쟁에 쫓겨, 가장 나쁘게는 진영 논리와 경제적 이해에 매몰돼 자주 길을 잃었고 끝내는 스스로 추락했다. 요컨대 한국언론의 위기는 디지털-모바일 혁명을 따라잡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래 축적된 저널리즘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과거 정보독과점 시절엔 그 실패가 쉬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감추려야 감출 수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

최근 불법 동영상 등을 공유해 온 ‘기자 단톡방’의 존재가 알려졌다. 미디어오늘이 보도한 실상은 충격을 넘어 공분을 샀다. 취재 정보 공유를 위한 단톡방에서 파생된 비밀방에서 기자들은 익명에 숨어 성범죄 피해 동영상과 사진을 공유하고 외모 품평을 하는가 하면, 성매매 업소 정보와 후기까지 나눴다. 이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나흘 새 2만4,000명이 참여했다. “정말 참담해요. 이런 기자들이 성범죄를 비롯한 사회 이슈를 제대로 공정하게 다룰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손가영 미디어오늘 기자)

단톡방 대화를 읽어내리다 나 역시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이쯤 되면 퇴출밖에 답이 없는 ‘뿔 달린 악마’라 할 만하다. 철저한 수사와 엄벌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어도 될까. 단톡방에 가입돼 있었으나 이들을 꾸짖거나 말리지 않은 기자들에겐 잘못이 없는 걸까. 취재ㆍ보도 윤리를 심각하게 훼손한 사건이 벌어져도 쉬쉬하거나 경징계로 어물쩍 넘겨 온 낡은 조직문화에는 책임이 없는 걸까. 설사 극소수 기자들의 일탈이라 해도 언론계 전체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이 사건에 언론사들이 침묵해서는 안 된다.

독을 품은 나무에서 온전한 열매가 열릴 리 없다. 성범죄뿐 아니다. 안일한 관행이 낳은 표절 논란처럼 몇 줌 남지 않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더 세차게 흔들어댈 사건들이 이어질 수 있다. 신뢰 따위 포기한 게 아니라면, 나쁜 관행과 낡은 문화부터 갈아엎어야 한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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