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에티오피아의 커피 순례자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후로 며칠간 하릴없이 아디스아바바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뒹굴었다. 커피 산지 방문은 여러 이유로 미루어졌다. 에티오피아 서남부에 위치한 짐마(Jimma)와 카파(Kappa)로 향하는 계획이 치안 불안을 이유로 취소되면서 예정된 일정이 꼬였다.

무료한 시간. 느릿하게 동네를 배회하거나 북적거리는 시장을 찾기도 했다. 도시는 삶의 에너지로 활기가 넘친다. 소음과 매연을 내뿜고 달리는 자동차들과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 여느 아프리카 도시 풍경과 다르지 않다.

밤에는 시차 때문에, 새벽에는 확성기로 들려오는 회교사원의 기도소리에 잠을 설치다가 낮에 늙은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조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스름 해질녘에 근처 골목길의 분나(Bunna, 에티오피아 암허릭어로 커피란 의미) 가게에 쭈그리고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지나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해가 저무는 시간은 손에 잡힐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아디스아바바의 작은 골목 찻집. 로스팅부터 분쇄, 추출까지 다하는 일종의 로스터리 카페다. 거의 태우듯 볶고, 설탕을 넣어 달고 쓴 맛이 특징. 이 곳 사람들은 분나(Bunna)라고 부른다. 최상기씨 제공

닷새째 아침. 비로소 우리를 안내할 차량이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구형 모델의 사륜구동 차는 낡은 것은 둘째치고 일행에 비해 공간이 턱없이 좁다. 한참 실랑이 끝에 그냥 타고 가기로 했다. 여행 짐들을 차 지붕으로 올리고도 남는 짐들과 함께 짐칸에 부려지는 신세가 됐지만 무료함으로부터 떠날 수 있음에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커피의 귀부인을 알현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애당초 쉬운 길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의 순례자처럼 일부러 편한 여정을 외면했을 지도 모른다. 순례객들이 산티아고로 가는 편리한 교통편을 몰라 그 고생을 하겠는가.

남쪽으로 향하는 길 내내 짐짝처럼 구겨진 채 안으로 들어오는 뿌연 흙먼지와 검은 매연에 마른 기침을 뱉어야 했다. 비포장길의 거친 노면과 갑자기 출몰하는 가축들로 차는 심하게 흔들렸고 그런 흔들림으로 잠깐 눈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아침에 출발한 차는 그렇게 하루 종일 달려 날이 어둑해진 후에야 겨우 목적지 이르가체페(Yirgacheffe, 예가체프)에 도착했다. 커피의 성지와도 같은 곳, 이르가체페.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길. 일부 포장 도로도 있지만 대부분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이다. 어느 마을을 지나며 찍은 차창 밖 풍경. 좌판을 펼친 소박한 노점이 눈길을 끌었다. 최상기씨 제공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이어지는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의 고원을 따라 남쪽으로 대여섯 시간 울퉁불퉁한 포장도로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을 번갈아 달리다 보면 이르가체프가 있는 게데오(Gedeo) 존의 관문이자 이 지방의 제일 큰 도시 딜라(Dila) 타운에 도착한다. 이 곳을 관통해 다시 두 세시간 가량 비포장 길을 더 가면 조그마한 이르가체페 읍내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커피의 중간 집산지인 딜라나 이르가체프의 작은 읍내에서도 여기가 세계적인 커피 생산지임을 알게 해주는 단서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산비탈 저 멀리로 문득문득 보이는 커피 가공 처리시설(Preparation Station, 수확한 커피 체리의 과육을 벗기고 햇볕에 건조시켜 커피 생두를 생산하는 시설)이 커피산지임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게 해줄 뿐, 길거리는 지나온 여느 에티오피아의 시골 풍경과 다름없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 염소와 양, 소떼, 당나귀들과 무엇을 파는지 알기 힘든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이어질 뿐이다.

이르가체페로 묶어서 통칭되는 커피는 이 지역(게데오)의 가장 북쪽인 딜라에서부터 재배된다. 딜라 주리아, 웨나고, 이르가체페, 코체레, 게데브에 이르기까지 수 백개의 협동조합과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 가공시설(스테이션)들이 산언덕빼기 경사면에 듬성듬성 흩어져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콩가, 코케, 아리차 등의 마을과 협동조합들도 바로 이 곳 이르가체페 커피 산지에 자리잡고 있다.

화려한 풍미의 꽃향과 과일의 달콤함을 잔뜩 머금은 커피의 귀부인 이르가체페. 그 깊고 그윽한 향미에 이끌려 이 먼 곳까지 달려온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나는 것이나, 오체투지 고행의 길이 티베트 라싸에 이르는 것처럼 커피의 귀부인을 알현하기 위해 멀고 힘든 여정으로 이르가체페 골짜기까지 찾아왔다. 그날 험난한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순례자라도 된 양 벅차 오르는 설렘으로 가득한 밤을 보냈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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