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피티 작가 레오다브가 16일 인천 중구에 소재한 본인의 크루 'LAC'의 작업실에서 그라피티 작업을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딸깍딸깍’ ‘치익’ 소리가 두어 번 들리자 야릇한 스프레이 페인트 냄새가 주변을 채운다. 온갖 글씨와 그림으로 어지럽던 벽에는 노란색 선명한 ‘POWER OF CULTURE(문화의 힘)’라는 글씨가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글씨 주변으로는 이미 ‘PEACE(평화)’ ‘LEGACY(유산)’와 같은 단순한 글자와 알록달록한 카모플라쥬(위장색) 무늬, 화려한 그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 좋아하는 것을 그리면 되는 거죠.” 16일 찾은 그라피티 작가 레오다브(Leodavㆍ최성욱)가 속한 크루 ‘LAC’ 작업실에서는 수많은 스프레이 흔적이 서로를 덮고 덮으면서 벽에 활기찬 생기와 단단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라피티(Graffiti).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낙서로만 보일 이 글씨와 그림은 ‘긁어서 새기다’라는 어원을 가진 대표적인 거리 예술 중 하나다. 1960년대 중·후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일부 청년들이 이름이나 짧은 메시지를 도시 곳곳에 경쟁적으로 남기던 문화에서 시작돼 전세계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고작해야 60년 정도, 예술 장르의 정착 기간 치곤 짧기만 한 그 시간 동안 그라피티는 ‘불법’과 ‘예술 행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다 지금은 어엿하게 현대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이달 7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3.1운동 100주년 기념 그라피티 작가 레오다브의 '독립운동가' 연작이 외벽에 부착되고 있다. 홍인기 기자

그라피티를 ‘치기 넘치는 아이들이 하는 낙서’ 정도로 인식하던 우리나라에도 변화는 감지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이달 10일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과 벽에 LAC 크루의 ‘독립운동가 연작’ 그라피티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 지난해 12월 청와대 사랑채에서 진행된 전시에도 그라피티 작가 로얄독(RoyyalDogㆍ심찬양)이 초대받아 남북정상회담의 악수 장면과 한복 입은 다문화 소녀들을 그렸다. 공공기관이나 일반 기업들이 최근 해외 유명 그라피티 작가들을 초청해 작품을 남기거나 협업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우리나라 대중에게도 그라피티가 당당히 예술의 한 장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프레이나 마커로 벽에 글씨와 그림을 그려넣는 것 말고도 스티커를 붙이는 그라피티 행위도 있다. 빠르게 붙이고 도망갈 수 있으며, 도시 곳곳에서 눈에 띄기 쉽다는 점에서 '영역 확장'을 알리는 데도 효과적이다. 팡세 제공
 
 ◇90년대 힙합 문화와 함께 시작된 한국의 그라피티 문화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그라피티는 스프레이나 마커로 자신의 이름이나 상징을 도시 곳곳에 남기는 행위다. 하지만 방식은 이름만 간단히 쓰는 ‘태깅(Tagging)’부터 화려한 그림처럼 보이는 글씨를 그리는 ‘피스(Piece)’, 종이에 구멍을 뚫어 스프레이를 뿌리는 ‘스탠실’까지 천차만별이다. 일부는 저항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허락되지 않은 곳에 스프레이를 뿌린 뒤 종적을 감추는 ‘바밍(Bombing)’ 행위만 오리지널 그라피티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다양한 거리 예술 전체를 ‘그라피티 문화’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그라피티는 1990년 중후반 힙합 문화와 함께 한국에 상륙했다. 이방인에 대한 시선이 늘 그렇듯 주변에서 보는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도시의 빈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작품은 ‘불법 딱지’를 붙인 채 이내 페인트칠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국내 1세대 그라피티 작가들이 대중적 작품으로 명성을 얻기 전까지, 그라피티는 그렇게 부정적인 하위문화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라피티 작가 레오다브가 16일 인천 중구의 작업실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들 앞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독립운동가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림이 많다. 배우한 기자

“기본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겁니다. 저는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독립운동가 연작’으로 유명세를 얻은 작가 레오다브 역시 대표적인 1세대 중 하나다. 대학생이었던 1998년 힙합 동아리에 들면서 그라피티를 시작한 그는 2013년 서울 삼청동 정독도서관 벽에 ‘허락 없이’ 유관순 열사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연작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독립운동가들 모습이 모두 레오다브와 그의 LAC 크루, 헥스터(Hexterㆍ황은관)와 다솔(Dasolㆍ한다솔)이 함께 작업해 온 작품들이다.

레오다브 작가가 2013년부터 그린 그라피티 '독립운동가 연작'.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달 10일부터 광화문 곳곳에 전시되고 있다. 왼쪽부터 조소앙 선생, 남자현 의사,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김상옥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이봉창 의사, 안창호 선생, 이회영 선생. 레오다브 제공

그는 작품마다 다양한 의미를 담고자 한다. 노란색 배경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몸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투쟁을 이어가던 ‘유민 아빠’ 김영오씨 모습을 본떴다. “안중근 의사라면 뜻 있는 단식 투쟁에 함께했을 것”이라는 이유. 무장투쟁을 강조했던 남자현 열사는 현대식 특전사 군복을 입고 있고, 윤봉길 의사는 낱낱이 뜯어진 친일인명사전을 배경으로 폭탄 대신 그라피티 필수품인 마커펜과 스프레이, 방독면을 들고 있다.

지난달 대구 북성로 공구거리의 한 페인트 가게 셔터 위에 평화를 상징하는 '꽃' 그라피티를 그려넣은 팡세(오른쪽) 작가와 가게 주인. 팡세 제공
 
 ◇‘깨진 유리창’에서 ‘예술 작품’으로 

최근에는 도시 재생의 일환으로 그라피티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구 북성로 공구골목이 대표적이다. 쇠락한 골목의 낡은 벽에 하나 둘 그라피티 작품이 들어서면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었고, 거리는 금새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주차장 위 벽에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달과 사슴 그림이, 한 카페 벽에는 과거 북성로 모습을 그린 작품이 들어섰다. 물론 곳곳의 빈 벽에 태그와 피스 등 ‘오리지널’ 그라피티도 가득하다.

4년차 그라피티 작가인 팡세(Ppangseㆍ곽혜지)는 지난달 무작정 스프레이를 들고 대구를 찾았다. 한 페인트 가게 문을 두드렸고, 주인의 흔쾌한 허락에 멋진 작품을 가게에 남겼다. “오후 7시면 가게가 문을 닫아 거리 전체가 어둑한 곳이었어요. 셔터를 닫았을 때 그림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가게가 문을 닫을 때마다 팡세가 남긴, 그의 상징인 붉은 꽃과 자화상이 강렬하게 등장했다.

그라피티는 심심한 도시 풍경을 재미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얼룩진 흰색 벽이었던 서울 마포구의 한 슈퍼 옆에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프린트된 종이를 밀풀로 붙이는 방식의 그라피티다. 곽주현 기자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던 팡세는 고객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맞춰야 하는 업계 시스템에 싫증을 느꼈다고 한다. “예술가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놓고는, 정작 디자인 회사에서는 개성이 강한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죠. 저는 저 자신을 표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고, 그라피티를 처음 접했을 때 ‘이거다’ 싶었어요.”

2010년대 들어 발달하기 시작한 인스타그램 등 사진 기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팡세와 같은 신인 작가들에게 포트폴리오이자 참고서가 됐다. 작가들은 비바람에 닳거나 페인트로 덮여 언젠가 사라질 작품들을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게 됐고, 그라피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간단한 검색만으로 수많은 ‘선배’들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인증샷’이 중요한 SNS 문화를 타고 그라피티는 젊은 세대에게 ‘힙(Hipㆍ멋진)’ 문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라피티가 거리 곳곳에 많이 남아있는 베를린이 최근 ‘힙한 여행지’로 급부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1월 재정비를 통해 합법적인 공간으로 탄생한 서울 서대문구 '신촌 토끼굴'의 지난해 4월 모습. 현재는 이 그림들이 모두 다른 그림으로 덮여 있다. 서대문구청 블로그
 
 ◇우리에겐 ‘벽’이 필요하다 

특정 단체나 개인으로부터 의뢰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그라피티를 그릴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현재 누구든 자유롭게 그라피티를 그릴 수 있는 ‘프리월(공공 벽)’은 ‘압구리(압구정 굴다리)’와 ‘신촌 토끼굴’ 정도다. 작가 레오다브는 “작가들이 그라피티를 연습하거나 서로 덮고 덮이며 실력을 겨루는 독특한 문화를 이어가기엔 공공 벽이 너무 부족하다”며 “허가 받지 않은 그라피티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공공 벽을 늘려달라고 지자체에 많이 요구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청이 지난해 1월 그 동안 비공식적으로 그라피티를 눈감아주던 신촌기차역 근처 작은 터널을 공식적인 ‘프리월’로 지정했지만, 공간 자체가 너무 작고 새벽 시간에만 작업을 허용하는 등 한계가 뚜렷하다. 2016년 ‘우리는 벽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는 팡세는 “그라피티는 ‘보이기 위한 예술’인 만큼, 곳곳에 허용되는 공간이 더 늘어나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하면서 친근감을 느끼게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칠이 벗겨진 오래된 벽은 때로 그 자체가 좋은 배경 그림이 된다. 오래된 벽면에 추락하고 있는 소녀를 스텐실 기법으로 그려넣은 이 그라피티 작품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다. 레오다브 제공

그라피티 작가들은 이런 이유에서 ‘좋은 벽’을 직접 찾아 나선다. 곧 철거될 건물이나 폐공장, 창고 등이 타깃이다. 간단한 태깅이나 스티커 그라피티는 길거리 쓰레기통이나 공사판 가벽, 가로등을 노린다. 칠이 벗겨진 오래된 벽은 간단한 그림 하나를 덧붙이기만 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레오다브는 “낡은 것 자체로 예술이 되는 것도,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도 거리 예술만의 매력”이라며 “해외에서는 그라피티 투어가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작가들이 노력을 좀 더 한다면 한국에서도 그라피티가 거리 풍경이자 예술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