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동상. 코리아타임스

달력을 보니 오는 일요일이 ‘충무공이순신탄신일’이라고 한다. 기억하기로는 옛날에는 ‘충무공탄신일’이라고만 했던 것 같은데, ‘이순신’이란 존함이 들어갔다. 아마도 조선조에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 또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잘한 일이다.

중국에도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 있다. 당(唐)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 697~781)이다. 그는 8남 8녀를 낳았고, 현종ㆍ숙종ㆍ대종ㆍ덕종, 네 임금을 섬기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85세를 살다간 명장이자 충신이다.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이 임금 자리에 있던 755년, 태평성대 같아보이던 당나라는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반란으로 일거에 무너진다. 이른바 ‘안사(安史)의 난(755~763)’이다.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당나라를 재건한 사람이 곽자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니다. 당나라 황제가 직접 한 말이다.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이 개선하는 곽자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된 것은 경의 덕분이오.(國家再造, 卿力也)”

곽자의는 아들과 사위가 모두 조정의 고관이었다. 곽자의 환갑날 잔치가 벌어졌다. 모두들 황궁에서 퇴궐하고 바로 오느라 홀(笏)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홀은 조정에서 신하가 임금을 뵐 때 지참하는 도구이다. 아들과 사위들이 홀을 탁자에 올려놓았는데 탁자에 홀이 가득 찼다고 한다. 이것이 후일 ‘만상홀(滿床笏)’이라는 경극(京劇)과 성어를 만든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말, 부귀영화ㆍ건강장수ㆍ자손만당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해야 할까.

곽자의는 중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삶, 그 자체다. 외견상 그의 일생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황제가 그를 상부(尙父)라고 불렀고, 공신각에 초상이 걸렸으며, 왕에 봉해졌다. 그가 죽자 임금이 통곡하며 성 밖에 나와 상여를 배웅했다고 한다.

“공로가 세상을 덮었어도 임금이 의심하지 않았다.(功蓋天下而主不疑)”, 곽자의에 대한 ‘자치통감’의 평가다.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정사(正史)인 ‘신당서’, ‘구당서’를 보면 그렇지 않다. 순탄치만 않은 인생이었다. 당연히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황제를 부추겨 수시로 전선에 있는 그를 불러댔다. 안 오면 반역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였고, 오면 죽이려고 들었다. 곽자의는 황제가 부르면 곧장 갔다. 언제나 무장을 하지 않은 채로. 그런데도 황제는 그를 의심하여 수시로 병권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급하면 다시 불러 도와 달라고 했다. 곽자의는 병권을 내어 놓으라면 언제든지 따랐고, 부르면 언제든 다시 갔다. 그의 나의 육십 즈음부터 26년을 한결 같았다. 나중에는 오히려 황제가 민망했다. 곽자의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황제가 곽자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의 아들 곽애는 대종의 딸 승평공주와 결혼했다. 하루는 둘이서 싸웠다. 공주는 너 내가 누구 딸인줄 알고 이러냐고 소리를 질렀다. 곽애가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천자라고 유세하냐. 우리 아버지가 천자하기 싫어서 안하는 거야. 공주가 화가 나서 황제에게 고자질 했다. 황제가 말했다. 그건 네 신랑 말이 맞다. 곽씨 집안이 천자가 되려고 하였다면 천하가 어찌 우리 집안 것이겠느냐. 그리고 딸을 달래서 돌려보냈다. 곽자의는 소식을 듣자, 아들을 가두고 황궁으로 달려가 처벌을 기다렸다. 황제가 말했다. “속담에 애들 일은 어른들이 모른 척하는 게 좋다지 않소. 철부지들이 투닥거린 거니 신경 쓰지 맙시다” 곽자의가 아들을 흠씬 두들겨 주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다. 일가족이 몰살을 당할 뻔했던 일이 군신간의 신뢰를 보여주는 미담으로 바뀐 셈이다.

조선의 ‘충무’는 어땠는가.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이순신의 일화가 실려 있다. ‘충무공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부채 따위를 만들어 두루 조정의 고관들에게 선물하여 마침내 중흥의 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천고에까지 지사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다.’ 이익은 다음 같이 부연 설명한다. “다만 방해를 할까 두려워서이지 이익을 구하려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소인들에게 방해를 받아 자기의 포부를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리를 지켜야 했다. 부채 따위로 환심을 사려한다는 비아냥을 감내했다. 임금 눈에 한심한 작자로 보여야 살아남는다.

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우고도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의병장 김덕령 장군. 그를 기리는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를 보면 ‘당시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의병이 되지 말라고 서로 권했다’고 한다. 공을 세우면 오히려 역적으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이순신과 곽자의, 두 사람 모두 나라에 충성을 다했건만 왜 이리 다른 모습인지. 정말 임금 잘 만나기만 바라야 했는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이 죽었다. 그리고 1643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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