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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 “남자가 큰 꿈을 꿔야지... 무슨 애 보는 일을 하냐” 편견에 우는 보육교사

입력
2019.04.23 04:40
수정
2019.04.23 09:2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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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편견에 우는 남성 보육교사들

※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한 두 가지 측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자신의 불편은 크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일보> 는 격주 화요일 한국 사회에서 유독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지난 19일 광주 방림유치원 1년 차 교사 임정섭씨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수업에 한창이다. 1986년 광주시교육청 개청 이래 첫 공립유치원 남자 교사인 임씨는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 모두를 해야 하는 만큼 교직사회에 남자 교사들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정섭씨 제공
지난 19일 광주 방림유치원 1년 차 교사 임정섭씨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수업에 한창이다. 1986년 광주시교육청 개청 이래 첫 공립유치원 남자 교사인 임씨는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 모두를 해야 하는 만큼 교직사회에 남자 교사들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정섭씨 제공

“무슨 남자가 애들 콧물 닦고 밥 먹이는 일을 해?” 경기도의 한 민간 어린이집 교사 이정환(26∙가명)씨는 2년 전 어린이집 취업을 준비할 당시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앞서 수도권의 한 4년제 대학 유아교육학과에 진학했을 때보다 가족들의 반대가 더 거셌다. 대학 재학 기간 내내 다른 적성을 찾으라며 전과(轉科)를 권유했던 부모님은 아들이 고집을 꺾지 않고 보육교사로 진로를 결정하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재차 비수를 꽂았다. “남자가 큰 꿈을 꿔야지. 넌 야망도 없니?”

고등학생 때부터 교회 유치부 교사 활동을 하며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지냈던 이씨는 ‘보육교사’란 자신의 꿈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교회 아이들과 종이 접기를 하고 유아 찬송을 함께 부를 때 이씨는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어린이집 취업 문을 두드릴 때마다 이씨는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1년여 동안 20여통의 이력서를 크고 작은 어린이집에 제출했지만 면접 기회라도 얻은 곳은 현재 근무 중인 어린이집이 유일하다. ‘남자 교사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는 막연한 거절 이유가 들려왔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보살필 수 있다는 의욕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지만 낙방이 계속되자 잠시나마 다른 길을 고민하기도 했다. 보육교사가 되겠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이 못마땅해하는 것도 모자라 취업 길까지 막혔던 막막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이씨가 말했다. “제 성별이 아닌 교사로서의 능력으로만 평가받고 싶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매년 3월 유치원 입학 시기가 되면 일명 ‘맘 카페’ 등 육아 정보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우리 아이 유치원에 남자 선생님이 계시던데 괜찮을까요?”란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부모들은 ‘여성 교사에 비해 섬세하지 못할 것 같다’ ‘딸 키우는 입장에서 남자 교사는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같은 불안감을 토로한다. 입학식 내내 부모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남자교사들은 괜히 ‘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원장 등 기관장들에게도 남자 교사를 고용하는 건 그래서 ‘모험’이자 ‘도전’이다. 남자 교사만의 장점을 분명 알고 있지만, 부모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뒤돌아 한번 더 쳐다보게 하는 남자 교사를 굳이 고용하고 싶지 않다는 기관장들도 많다. “남자가 무슨 애 보는 일을 하냐”는 사회적 편견에도 모자라, 남자란 이유 단 하나만으로 취업의 문턱에서까지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교사? “우리 어린이집은 NO”

국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남성 교사들은 거의 ‘천연기념물’ 수준으로 드물다. 교육계의 여초(女超)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교사가 교육은 물론 보육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경우 남성 교사들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존재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국내 어린이집(국공립, 민간 등 모두 포함) 남성 보육교사 수는 1,412명. 전체(26만8,294명)의 0.5%에 불과한 숫자다. 정부가 보육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해 수년간 어린이집을 확충해 오면서 보육교사 수는 2015년(22만9,116명)과 비교해 4년 만에 4만명 가까이 늘었지만 남성 교사는 반대로 500명 가까이 감소했다. 어린이집보다 사정이 낫다지만 유치원도 남자 교사를 찾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지난해 전체 유치원(국공립, 사립 포함) 교사 5만4,892명 중 남자는 고작 1.7%(941명)에 불과했다.

연도별 유치원∙어린이집 교사 현황. 그래픽=송정근 기자
연도별 유치원∙어린이집 교사 현황. 그래픽=송정근 기자

국내 대학에서 유아교육이나 아동학 관련 남자 전공자가 배출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중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진학 자체를 꺼리는 탓에 전공자가 소수이기도 하지만 취업이 쉽지 않은 것도 남자 보육교사 수가 적은 이유로 꼽힌다. 지난해 경기 성남의 한 사립유치원에서 근무했던 강수일(25ㆍ가명)씨는 최근 한 직장 어린이집으로 이직을 하려던 중 황당한 일을 겪었다. 1년 동안 유치원에서 쌓았던 경험을 토대로 서류와 면접전형을 모두 통과해 새 출근 날만 기다렸는데, 원장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입사 취소’ 통보를 받은 것이다. 어린이집 학부모위원회에서 “남자 교사 채용은 절대 안 된다”라는 의견이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강씨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교사로서 자질이나 장점은 하나도 보여 주지 못했다”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화라도 한 번 나눠 봤다면 그나마 덜 아쉬웠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강씨처럼 기관장에게 교사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애당초 남자 교사 채용은 ‘불가’라고 선을 긋는 기관장들도 많다. 부모들의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서울 은평구의 한 민간 어린이집 원장 A(47)씨는 “야외체험 학습이나 체육 활동을 포함해 남자 교사들이 아이들과 지내는 데 도움이 될 때가 많고, 여자 교사들보다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교사들도 많다”면서도 “부모님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채용이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번이라도 남자 교사를 경험해 본 부모님들은 만족도가 높지만 남자 교사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대부분 꺼리는 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 “세상이 흉흉해서” 남교사는 위축

남자 교사들은 아이들과 지내는 현장에서의 고충도 적지 않다. 특히 여자 아이들의 화장실 사용은 남자 교사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다. 영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배변 교육이 필요한 유아가 있을 때만큼은 동료 여교사의 손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서울 마포구의 한 민간 어린이집 2년 차 교사 김모(26)씨는 “지금까지 기저귀 갈이는 남자 아기들만 대상으로 해 왔다”며 “소변 실수를 하거나 음식물을 흘려 급하게 옷을 갈아 입힐 때를 제외하고는 여자 아기들의 기저귀는 동료 여교사들에게 부탁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사립유치원에서 근무했던 이모(26∙현재 휴직 중)씨도 “학기 초에 한 여자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선생님이 화장실도 같이 가시는 건 아니죠?’란 말을 들었다”며 “원장 선생님도 처음부터 (학부모들로부터) 말이 나오지 않게 화장실 문제는 다른 여자 선생님에게 부탁하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배변 교육도 교육의 일부이지만 남자 교사들 스스로도 조심스러워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남자 교사 스스로도 움츠러들 때가 많다. 영유아들은 놀이나 생활습관 지도 과정에서 교사의 신체적인 스킨십이 필요할 때가 많지만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여자 아이 부모들은 더 불안해한다”는 말을 듣는 남자 교사들로선 본의 아니게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담임교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부모들의 시선 때문에 부담임 격의 보조교사를 자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체격이 크거나 인상이 강하면 처음엔 아이들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어 외모에 대한 고민도 생긴다. 남자 교사들이 학기 초반을 가장 힘들어하는 이유도 이 시기가 첫 인상부터 시작해 자신을 향한 ‘미심쩍은 시선’을 극복해야 하는 시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여자 교사보다 두세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들은 털어놓는다. 강수일씨도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지만 아동이나 미성년자 성범죄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뉴스에 오르내리면 아무래도 더 조심스러워지는 건 사실”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처음부터 남자 교사를 신뢰하는 원장이나 학부모들은 없는 것 같다”며 “원장들도 채용 후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라 행동 하나하나에 더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아빠 역할도 필요해요

물론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이 같은 우려를 보란 듯이 잠재운 ‘인기 만점’인 남자 교사들도 많다. 올해 3월 서울의 한 공립유치원에 임용된 초임교사 김태영(27)씨는 “남자 교사들은 아무래도 더 활동적으로 놀아줄 때가 많아 아이들이 더 쉽게 다가오는 것 같다”며 “3, 4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매달리기도 한다”며 웃었다. 김씨는 “처음엔 남자 교사를 마냥 신기하게만 생각했던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집에 와서 ‘유치원에서 김태영 선생님이 제일 좋다’는 말을 많이 한다는 얘기를 전해줬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공립어린이집에서 근무 중인 3년 차 교사 차경열(25)씨는 “남자는 무뚝뚝하고 섬세하지 못 할 거란 편견이 많은데 아기자기한 교구를 직접 만들고 그림도 잘 그리니 이제는 부모님들이 더 좋아해 준다”고 말했다.

차경열씨가 자신의 교회에서 열린 아기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율동을 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공립유치원에서 근무 중인 차씨는 “한부모 가정 등 아빠의 역할이 결핍된 아이들에게 남자교사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빈자리를 채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차경열씨 제공
차경열씨가 자신의 교회에서 열린 아기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율동을 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공립유치원에서 근무 중인 차씨는 “한부모 가정 등 아빠의 역할이 결핍된 아이들에게 남자교사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빈자리를 채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차경열씨 제공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여전히 ‘OO대학교 유아교육학과의 유일한 남학생’이 되기까지 가족들의 우려와 반대란 걸림돌을 뛰어넘어야 하고 ‘OO유치원의 유일한 남자 교사’가 되기까지 편견과 따가운 눈총을 이겨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남녀 교사 모두를 통해 아이들은 성별 역할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보육이나 유아교육 분야에서 극심한 여초 현상은 아이들을 돌보는 건 ‘마땅히 여성의 몫’이란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해결돼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가정에서 엄마에 비해 아빠의 역할이 부족하거나 아빠란 개념 자체가 없는 아이들에게 이들은 좋은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차경열씨는 “최근 한부모 가정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 아빠의 보호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며 “완벽하진 않지만 남자 교사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 방림유치원 1년 차 교사 임정섭(27)씨도 “교사들은 가정에서의 엄마 역할 뿐 아니라 아빠 역할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남자 교사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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