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 담보신탁대출 이후 입주한 청년들 후순위로 밀려나
살 집도, 전세보증금도 잃을 처지에 몰린 세입자들이 지난 19일 서울 상도동 탑아트빌딩 앞에서 자신들이 살던 원룸을 바라보고 있다. 홍인택 기자

“원룸 전세보증금을 받아야 신혼집 구하는데 보탤 수 있을 텐데, 돌려받을 길이 안보여 결혼까지 연기했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상도동의 6층짜리 탑아트빌딩 앞에서 만난 세입자 이모(30)씨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군 제대 뒤 대학에 복학했을 때부터 취업 2년 차인 지금까지, 8년째 머물렀던 정든 보금자리다. 5평(16.5㎡) 남짓한 원룸은 물론 좁았다. 하지만 걸어서 통학할 수 있었고, 마침 직장까지 근처에 구하는 바람에 이사 걱정 없이 쭉 살았다. 대학, 군입대, 취직의 문턱을 넘어 결혼으로 가려던 찰나에 문제가 생겼다. 빌딩이 공매될 상황에 놓였는데 채권자 중 이씨는 ‘후순위 수익자’로 밀려났다. 신혼집 마련할 때 보태려던 전세보증금 6,500만원을 날릴 판이다. 피해자는 이씨 만이 아니다. 대부분 대학생, 취업준비생, 사회 초년생 같은 젊은이들이다.

서울 상도동 탑아트빌딩의 5평 남짓한 원룸 67가구에는 전세계약을 맺은 세입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홍인택 기자

인근 부동산 등에 따르면 탑아트빌딩에는 층마다 10여 개씩 모두 67개의 원룸이 있다. 여기엔 전세계약을 맺은 세입자들이 살고 있다. 근처에 중앙대와 숭실대가 있고,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저렴하다 보니 세입자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위기에 몰린 건 지난 2016년 벌어진 일 때문이다. 그 해 5월 집주인 오모(65)씨는 탑아트빌딩을 한 신탁회사에 담보로 맡기며 한 새마을금고로부터 25억원 가까이 대출을 받았다. 채권최고액은 33억8,000만원이다. 67가구 중 37가구의 세입자들은 담보신탁대출을 받은 이후에 들어온 후순위 수익자들이다. 이씨는 2012년 2월 첫 전세계약을 맺었지만, 담보신탁대출 이후 방을 옮기며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되는 바람에 후순위로 밀려났다. 오씨가 빚을 못 갚으면서 신탁회사가 건물을 공매 처분할 움직임을 보이자, 이들은 집도 잃고 전세보증금도 날릴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있다.

5평 남짓한 원룸 67개로 이뤄진 탑아트빌딩의 복도로 한 세입자가 걸어가고 있다. 홍인택 기자
◇금융권 ‘보증금 축소’ 확인 안하고 부동산 “문제 없다” 계약

세입자들이 분노하는 건 집주인 오씨가 담보신탁대출 과정에서 전세를 월세로 바꿔 신고하는 방법으로 보증금 규모를 축소했고, 신탁회사나 대출을 해준 금융회사는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줄여야 빚이 줄어 대출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세입자들은 2016년 당시 실제 임대보증금이 이미 30억원을 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담보신탁계약서에 적힌 임대보증금 총액은 17억1,500만원에 불과했다. 심지어 2012년부터 전세로 탑아트빌딩의 원룸에서 살아온 이씨의 경우엔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내는 세입자로 기재돼 있다. 대출 뻥튀기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입자들은 전월세 보증금을 우선 변제토록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의 ‘확정일자’를 받았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신탁 계약 특성상 신탁회사 동의를 안 받은 임대차 계약은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주인이 아닌 오씨와 계약을 맺은 세입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담보신탁 계약 이후 들어온 이들은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 전세계약에 경험이 없는 이들이다 보니 “별 문제 없다”는 말을 믿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2017년 탑아트빌딩에 입주한 중앙대 3학년 정모(23)씨는 “부동산 앱으로 집을 찾았는데, 중개업자는 ‘집 주인이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이라 어디 맡겼을 뿐이고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별 일 아닌 듯 설명했다”고 말했다.

2012년부터 전세보증금 5,000만원에 탑아트빌딩 원룸에서 살아오다 2017년 6,500만원짜리 방으로 옮기며 재계약한 이씨. 그러나 이씨는 담보신탁계약서 상에는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내는 세입자로 기재돼 있다. 홍인택 기자

집주인 오씨가 지난 1월 수원지법에 회생계획안을 제출했지만 신탁회사는 언제든 건물을 공매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 세입자들은 냉가슴만 앓고 있다. 숭실대 졸업 뒤 3년째 탑아트빌딩에 거주하며 취업을 준비하는 이모(29)씨는 “학교 근처에서 공부하려 부모님 퇴직금을 받아 전세로 들어왔다”며 “모두 내 탓인 것 같아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세입자들은 “제발 건물 공매만은 늦춰달라”고 호소 중이다. 신탁회사가 공매를 진행해 새 집주인이 들어오면 이전 세입자들은 전세보증금을 보호받을 길이 없고, 새 집주인이 명도소송 등을 내면 집에서도 내쫓긴다.

세입자 대책을 듣기 위해 수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집주인 오씨는 “지금 서울에 없고 협상 중”이라고만 했다. 돈을 빌려준 새마을금고 측은 “세입자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오씨의 회생절차가 진행되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신탁회사 측은 “(전세금 반환 소송 등으로) 비용이 발생했는데 위탁자인 집주인이 지급하지 못하면 신탁 부동산을 처분해서 지급하는 게 일반적인 절차”라고 밝혔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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