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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입력
2019.04.2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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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의사로 살면서 흔하게 받는 질문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병원이 아닌 곳에서 환자를 만난 적이 있냐는 것이다. 갑자기 발생한 사고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의사가 완벽한 처치를 하는 극적인 장면을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기대를 충족하는 무용담이 전혀 없을 정도로 병원 밖에서는 환자를 마주한 적이 없다.

그러나 얼마 전 여행 중 비슷한 경험이 생겼다. 우연히 마주한 열일곱 살 남학생이 저녁 식사 후 한 시간 전부터 복통을 호소했다. 정확히 명치 부근이었다. 올해 복막염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복부에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흉터가 있었다. 아랫배의 압통이 있었고, 표정을 찌푸리고 끙끙댈 만큼 복통은 제법 심했다. 수술 후 간혹 발생하는 장유착이나 장폐색으로 당장 진단을 내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초기 증상일 수는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 호전되는 양상으로 보였다. 다만 장유착의 경우 복강 안에서 급격히 탈수가 진행되니 만약을 대비해 수액을 보충해주며 관찰해야 할 것 같았다. 또 복통의 양상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서 악화되면 수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바다 위였다. 나는 배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육지에서 헬기가 날아와야 했다. 환자 상태가 악화될 경우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선내 의무실에 수액을 사용할 수 있냐고 문의했다. 그리고 나는 환자와 함께 호출을 받고 진료실에 나온 배의 공식적 의사를 만나러 갔다.

그는 노년의 일본인이었다. 나는 먼저 내 전공을 소개했고, 내가 파악한 환자의 상태와 의심되는 진단과 향후 계획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수액을 투여하면서 이 복통을 두 시간 간격으로 진료실에서 지켜보자는 의견을 냈다. 그는 일단 내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와 같은 정보를 얻었다. 비슷한 진찰을 마친 후 그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말했다. 일단 장유착이 확실하지 않고, 탈수도 지금은 심하지 않아 보인다. 진통제를 복용하고 수분은 구강으로 천천히 섭취하면서 객실에서 지켜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는 나에게 이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나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 위에서, 즉 제한적인 환경에서의 진료에서, 나는 경험이랄 것이 없었고, 그는 이 배에 오래도록 있던 사람이었다. 육지의 응급실에서 환자에게 수액도 투여하지 않고 나을 때까지 그냥 지켜보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는 한정된 자원을 일부러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선상 진료실은 정규 병원이 아니므로 감염에 취약하여 위험 부담이 있었고, 진료실을 채워두게 되면 다른 응급 상황의 대비가 어려워짐을 파악해서 그렇게 결론을 낸 것이었다. 각자의 진단은 같았지만 대처는 달랐다. 나는 내 판단보다는 그의 판단이 낫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전권이 당신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 더 옳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환자에게 설명했다.

환자는 약을 받아 객실로 돌아갔다. 방금까지 의견이 달랐지만 평화로운 결론을 낸 우리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 동안 배에서의 생활과 양국의 의료행위에 대한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역시 현장에 있는 사람의 말만큼 존중해야 할 것이 없다고 느꼈다. 설령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같은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 일을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해온 사람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무엇. 그래서 결국 조금 나은 것이었다고 밝혀질 그 결론. 여행은 순조로웠다. 환자는 밤새 잠이 들었고, 일어나 아침밥을 든든히 먹었으며, 햇살이 비치는 갑판 위를 뛰어다니다가 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역시 그도 평화롭게.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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