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1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차대전 격전지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국경지대인 이손초 강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독일군의 모습.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소장

1914년 8월1일 독일은 전쟁 개시를 러시아에 공식 통보했다. 이를 좀 더 큰 스케일에서 보면 1914년 7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상대 선전포고의 후속조치였다. 즉 독일-러시아 전쟁은 1차대전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전쟁은 사실상 별개의 전쟁이라 할 만했다. 3년이 넘는 전쟁 기간 내내 두 나라는 결투나 다름없는 대결을 벌였다.

19세기 초반만 해도 러시아와 독일의 상대적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철저히 짓밟힌 반면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체면을 구기는 사이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독일 통일을 이뤘다. 사실 러시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했더라면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은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애칭을 나누던 황제들이 맞붙다 

독일은 러시아와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1차대전 개전 시 독일의 주 관심사는 서부전선이었다. 독일은 선전포고 전날인 7월31일까지도 러시아를 향해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한다면 자국도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두 나라의 전쟁은 다른 관점에서도 어색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친척 간이었다. 빌헬름 2세의 어머니인 빅토리아 아들레이드와 니콜라이 2세의 부인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의 어머니인 앨리스는 각각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와 차녀였다. 빌헬름 2세와 니콜라이 2세는 서로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선전포고 후에도 동부전선에 대한 독일의 계획은 사실상 방치에 가까웠다. 총 8개 군의 병력 중 7개 군을 서부전선에 투입했고 1개 군만을 동부전선에 남겼다. 1891~1906년 독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러불(러시아-프랑스) 동맹과의 양면전쟁(2개 이상의 전선이 형성된 전쟁)을 상정하고 세운 ‘슐리펜 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러시아가 병력을 동원하는 데에 여러 달 걸릴 거라는 희망사항에 기반해 먼저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돌파해 프랑스로 진공한다는 것이 슐리펜 계획의 골자였는데, 러시아군은 독일의 선전포고 후 3주도 지나지 않은 8월17일 동프로이센의 국경을 넘음으로써 독일의 기대를 보란 듯이 깨트렸다.

독일의 희망과 달리 러시아는 전쟁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다는 욕을 먹지 않으면서 전쟁에 참가하기를 고대했다. 러시아가 믿는 구석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전쟁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전쟁의 철칙’이었다.

 ◇철석같이 믿은 전쟁의 철칙 

국가가 전쟁을 치르려면 군대와 무기는 필수였다. 이는 곧 고용은 물론이고 소비와 투자를 진작하는 기회가 늘어남을 의미했다. 한 나라의 경제 상황을 요약하는 지표로 흔히 사용되는 국내총생산은 위와 같은 시나리오 하에서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즉 전쟁을 벌이면 국가 경제가 좋아진다는 생각은 통상적인 경제학자들에겐 상식과도 같았다.

예컨대 미국의 관점에선 2차대전이 이러한 철칙의 명백한 증거였다. 금융시장에 내재된 불안정성으로 촉발된 1929년의 대공황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루즈벨트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37년에 불황이 다시 찾아왔다. 1938년의 미국 국내총생산은 3.3% 하락했고 실업률은 전년의 14.3%에서 19%로 치솟았다.

1939년 유럽에서 2차대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무기수출금지를 해제하며 경기 활력을 끌어올렸다. 그 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8% 올랐고 이후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인 1944년까지 매년 8%에서 19%까지 성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끝난 1945년 미국 성장률은 1% 감소했고 그 후로도 1948년을 제외하면 매년 감소했다. 그러다가 6ㆍ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다시 8.7% 성장했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해당 전쟁 기간 동안 군사비 지출을 20% 이상 늘렸다. 외부의 위협은 군대를 늘리고 싶은 국가 권력에게 언제나 좋은 핑곗거리였다. 산업화가 더뎠던 러시아는 증대된 군비의 대부분을 병력 증강에 사용했다. 이는 낙후된 산업구조가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1차대전 직전 러시아의 경제 상황은 파탄 직전이었다.

구체적으로 1차대전 직전 러시아군 병력은 140만 명 정도였다. 당시 약 8,000만 명의 러시아 인구를 감안하면 이를 500만 명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당시 독일 인구는 러시아의 80% 선인 약 6,500만 명인 데다가 병력이 서부와 동부 둘로 나뉘어야 했다. 러시아의 수적 우세는 슬프게도 460만 정밖에 없는 보유 소총으로 인해 제약되었다.

니콜라이 2세 입장에서 독일과의 전쟁은 ‘일타쌍피’를 노릴 수 있는 한 수였다. 전쟁의 철칙이 맞는다면 전쟁 결과와 무관하게 국내총생산과 직결되는 무기 등의 산업생산을 일거에 늘릴 수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쟁에 이길 경우 새로운 영토와 인구, 그리고 두둑한 배상금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부도난 회사의 경영진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회사 돈을 빼돌려 투기에 나서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1차대전 참전국 그래픽 = 강준구 기자
 ◇경제 살리려 창문 깬 자의 최후 

그러나 니콜라이 2세와 그를 둘러싼 경제학에 정통한 귀족들이 놓친 게 한 가지 있었다. 이른바 ‘깨진 창문의 오류’였다.

19세기 프랑스 정치인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아이가 돌을 던져 가게의 유리창이 깨져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를 폈다. 유리창을 수리하는 데 쓴 돈 6프랑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식이었다. 바스티아의 논리대로라면 전쟁은 정말로 경제를 살리는 길이 될 터였다.

바스티아의 논리에는 결함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가게 주인은 쓰지 않아도 될 돈 6프랑을 썼다. 아이가 유리창을 깨지 않았더라면 다른 요긴한 일에 쓸 수 있었던 돈이 없어진 셈이다. 그로 인해 가게 주인의 가족은 배를 곪게 될 수도 있었다. 유리창을 수리한 유리업자가 가게 주인의 6프랑을 빼앗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도 바스티아의 논리는 궤변에 가까웠다. 한번 깨지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작품, 혹은 멀쩡한 건물이 불타버리면 그저 사라질 뿐이다. 설혹 깨진 유리처럼 재생이 가능해도 애초의 유리를 만드는 데 들어간 사람의 수고는 연기처럼 소멸된다.

전쟁의 철칙을 믿었던 니콜라이 2세가 놓친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사람의 목숨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국내총생산이 증가되고 영토가 늘어나면 황제는 상관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의 피해는 국내총생산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늘릴 가능성도 있었다. 어머니가 해주는 밥은 전혀 기여가 안 되지만 투기로 인한 자산가격 상승은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 바로 국내총생산이다.

니콜라이 2세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는 체면치레를 했지만 독일군 상대의 전투에서는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1915년 전선은 현재의 라트비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즉 전쟁 전 러시아 영토에 형성되었다. 경제활성화 효과도 신통치 못했다. 1916년이 돼서야 겨우 무기 생산량이 이전보다 늘었다.

전쟁과 황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은 1917년 2월혁명을 일으켜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켰다. 독일의 빌헬름 2세도 1918년 11월 패전과 더불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를 끝으로 러시아와 독일에서 황제는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마지막 황제로 인한 전쟁에서 러시아군 사상자는 거의 1,000만 명에 달했다. 독일군도 동부전선에서 150만 명가량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는 별개였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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