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에 글을 씁니다.
 
 <5>이상의 ‘봉별기’ 
젊은 시절 시인 이상의 모습. 연합뉴스

봄마다 끄집어내 읽는 짧은 소설이 있다. 열 쪽밖에 안 되는데, 읽고 나면 긴 이야기를 들은 듯 아득해지는 소설이다. 이상(1910~1937)의 ‘봉별기(逢別記)’. 제목을 풀어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다. 인간사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피할 수 없으니, 인연의 기록은 결국 다 ‘봉별기’다.

1933년, 이상은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요양하다 기생 금홍을 만났다. 금홍을 서울로 불러 청진동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마담으로 앉혔다. 1935년 결별하기까지 이상은 금홍과 동거한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모던보이, 화가, 시인, 소설가, 요절한 천재. 난해한 작품세계로 유명한 이상은 이렇게 낭만적인 시도 썼다. “내가 이다지도 사랑한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이런 시’ 부분) 금홍과의 사랑이 맵고 잊히지 않아, 종이 위에 옮겨 놓았을까. ‘봉별기’는 이상의 자전 소설이다. 1936년, 이상이 죽기 바로 전 해에 발표한 작품이다.

“스무세 살이오.―삼월이오.―각혈이다.”

시절과 주인공의 신상이 짧고 강렬하게 드러나는 시작! 이런 게 스타일이다. 국어 시간, 소설 ‘날개’의 첫 문장에 열광한 청소년이 나 하나는 아니리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매 첫 줄을 이렇게 시작하는 일기를 쓰던, 풋내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파격, 실험정신, 아방가르드로 문단의 ‘문제적 인물’이었던 이상. 그의 작품은 근 백 년을 살아 남아, 지금까지 새롭고 신선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인 이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체대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118쪽) 화자는 금홍에게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으면서도 친구에게 금홍과 사귐을 권하는 등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한다. 결국 금홍을 아내로 맞아 “세상에도 없이 현란(絢爛)하고 아기자기”한 신혼을 보내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금홍에게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찾아온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을 만나거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가출을 일삼는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 보니까 금홍이는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 놓고 나가 버린 뒤였다.”(122쪽)

금홍이가 무서웠다는 대목에서 픽, 웃음이 나온다. 몇 번의 이별과 재회. 연인들의 유서 깊은 레퍼토리. 그들은 사랑하면서 미워하고, 도망가면서 그리워한다. 기괴한 사랑. 그러나 기괴하지 않은 사랑도 있던가. 나는 모든 사랑은 ‘속절없다’고 섣불리 판단하고는, 속절없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무리 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뜻.

 이상 소설 전집 
 이상 지음 권영민 책임 편집 
 민음사 발행ㆍ428쪽ㆍ1만 3000원 

화자와 금홍이 술상을 마주하고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을 읽어도 생경하게 섧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생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살아있는 채로 영이별을 하는 연인들. 금홍은 은수저로 소반을 두드리며 창가를 한 곡조 뽑는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장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당신이 나를 속여도, 내가 당신을 속여도. 꿈결이라니… 속절없다.

좋은 소설은 겪지 못한 인생을 ‘살아보게’ 한다. 다 읽은 후 고치처럼 몸을 말고, 웅크리게 만든다. 마치 상처 받은 것처럼. 이야기가 몸에 상처를 내고 들어와, 나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랄까. 어떤 이야기는 읽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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