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문희ㆍ남정임ㆍ윤정희 1세대 트로이카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정인엽 감독의 '결혼교실'(1970)에 출연한 신성일과 여배우 트로이카 남정임(위 왼쪽부터)과 문희 윤정희.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TV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 영화는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문화예술이었다.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1961년 5,800만명에 달했고, 불과 3년 뒤인 1964년에는 1억명, 1969년에는 1억7,300만명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늘어나는 관객의 수요에 부응하듯 충무로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편수와 흥행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1962년에 100편을 넘기던 제작편수는 1965년엔 189편, 1969년에 이르면 229편이었고, 1960년대 전반을 통틀어 1,500여편에 달했다. ‘로맨스 빠빠’(1960)와 ‘미워도 다시 한 번’(1969)과 같은 멜로드라마와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 ‘현상 붙은 사나이’(1961)와 같은 스릴러가 인기몰이를 했다. 국책에 의한 전쟁 영화와 문예영화의 비중이 높았던 한 편으로는, 시대극이나 코미디, 청춘물과 공포물 등 각종 장르를 총망라하는 다양성을 띤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 편수 증가로 생겨난 스타 시스템 

인기 배우를 중심으로 영화 제작이 이뤄지는 스타 시스템의 근간이 정립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주연급 배우의 인적 자원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연기자가 소화해야 할 영화의 수는 날이 갈수록 폭증하는 상황에서 영화 제작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배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제작진은 배우들의 일정에 맞춰 촬영 날짜를 조정해야 했고, 배우들은 영화 서너 편을 겹치기 출연하며 하루를 소진하기 일쑤였다. 신성일의 경우는 12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동시 출연한 적도 있었는데, 통금이 끝나자마자 그를 모셔가기 위해 영화사 제작부들이 서울 이태원의 자택으로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시집 가는 날’(1956)과 ‘박서방’(1960), ‘만선’(1967)으로 유명한 김승호는 서울에서 촬영하던 도중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 부산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녹음한 신영균 정도를 제외하면 배우 대다수가 표정 연기를 찍은 뒤 성우의 더빙을 입혔기에 가능했던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영화배우 문희.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배우 남정임.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성지 '여원'의 표지에 실렸던 배우 윤정희.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배우 가뭄 속 등장한 샛별 

여배우의 인력 부족은 가뭄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로 특히 심각했다.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문정숙 주증녀 등 1950년대부터 연기 활동을 지속해왔던 간판스타 몇몇을 제외하면 주연을 맡을 만한 신진이 유입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965년은 한국 영화계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1세대 트로이카’로 불린 여배우 문희와 남정임 윤정희가 차례차례 영화계에 데뷔했다. ‘트로이카’(troika)란 말 그대로 세 사람은 은막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한국 영화사의 전성기를 견인한 삼두마차였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문희는 218편, 남정임은 226편, 윤정희는 264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중 한창이었던 1968년에만 각각 40편, 58편, 50편을 찍었으니 이들의 활약과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세대 트로이카의 등장이 지닌 의의는 단지 새로운 얼굴이 주는 신선함에만 그치는 건 아니었다. 당시 여배우들의 캐릭터는 최은희 김지미 조미령으로 대변되는 정숙한 현모양처 아니면 도금봉 윤인자 최지희 등이 주로 연기한 악독한 팜므파탈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 세 사람은 제각기 지닌 남다른 개성으로 고정된 틀을 깨고 여성 배역의 다변화에 기여했다.

배우 문희.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라벌 예술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문희는 1965년 KBS 탤런트 선발 공모에 응시했다. 때마침 카메라 테스트반에는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이 참여해있었고, 그녀를 눈여겨본 것이 계기가 되어 ‘흑맥’(1965)에 캐스팅된다. ‘흑맥’ 촬영 당시 엄앵란은 “어린 나이에도 눈빛이 꺾이지 않는 모습을 봤다”며 문희를 칭찬했다고 한다. 이문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문희는 불량배 두목을 사랑하는 고아 출신의 아가씨 역을 맡아 청순한 인상을 한껏 살린 연기로 주목받았다. 이후 6년간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1967), 신상옥 감독의 ‘이조잔영’(1967),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 김기덕 감독의 ‘섬마을 선생’(1967)과 이규웅 감독의 ‘공주 며느리(1967)’ 등에 잇달아 출연했다. 경력의 정점은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이었다. 신파 멜로드라마의 대표작인 이 영화에서 문희는 유부남 신호(신영균)를 사랑하지만 본부인 때문에 난처해진 그를 떠나 홀몸으로 아들을 낳고 살아가는 비련의 여인 혜영을 맡아, 내성적이고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며 배역을 소화해낸다.

'청춘 고백'(1968)에서 신성일과 연기 호흡을 맞춘 남정임(오른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희의 대척점에는 활달하고 발랄한 청춘 연기를 장기로 삼은 남정임이 있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진학하고 KBS 탤런트 공모에 합격한 남정임은 김수용 감독의 ‘유정’(1966)에 발탁되면서 급속한 성공가도를 달린다. ‘유정’은 국도극장에서 구정프로로 개봉해 33만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이 되었다. 남정임은 제4회 청룡영화상 신인상, 제13회 아시아영화제 신인여우 장려상을 받으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본명인 이민자 대신 김수용 감독으로부터 받은 배역명 남정임을 예명으로 삼게 된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남정임은 ‘첫 정’(1971)으로 은퇴하기까지 연평균 20~30편을 찍는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했다. 특히 배우의 길로 이끌어준 김수용 감독과 꾸준히 합을 맞추어 ‘망향’(1966), ‘수전지대’(1968),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은 ‘분녀’(1968), ‘봄봄’(1969)과 경력의 마지막인 ‘웃음소리’(1978)까지 함께 하게 된다. 평소 남정임은 온순한 편이었지만 유독 질투심만큼은 남다른 성격이었다고 한다. 거리에서 라이벌인 문희와 윤정희가 출연한 영화의 포스터를 본 날이면 밥을 잘 먹지 못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영화 '분례기'(1971)의 윤정희.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정희의 데뷔는 ‘청춘극장’(1967)으로 트로이카 중 가장 늦었지만 영화에 대한 집념과 열정만큼은 단연 으뜸이었다. 지적인 이미지로 차별화된 인상을 주었던 윤정희는 ‘안개’(1967)와 ‘장군의 수염’(1968), ‘독짓는 늙은이’(1969)와 ‘위기의 여자’(1973) 등 장르와 캐릭터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문희가 ‘연인의 길’(1967)의 제작자였던 한국일보의 장강재 부사장, 남정임가 재일동포 임방광과 결혼해 은퇴하면서 트로이카 체제가 무너지는 1971년 이후에도, 윤정희는 유현목의 ‘분례기’(1971)로 대종상, 정진우의 ‘석화촌’(1972)과 신상옥의 ‘효녀 심청’(1972)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윤정희는 연기 생활 중에도 틈틈이 학업을 겸해 논문 ‘한국여배우론’으로 중앙대 석사 학위를 받은 근면한 노력파였다. 윤정희는 1973년 은퇴선언을 한 후 프랑스 파리 3대학에 유학해 9년간 공부를 지속하기도 했다. 트로이카의 전성기가 끝난 뒤에도 유일하게 현역 연기자로 남은 윤정희는 66세 때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주연을 맡아 생애 두 번째 대종상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게 된다.

 ◇영화에서 두 번 만난 트로이카 

기적적으로 세 사람이 한 영화에서 함께 연기한 일이 두 번 있었다. 최인현 감독의 ‘만고강산’(1969)과 정인엽 감독의 ‘결혼교실’(1970)에서였는데, 특히 ‘결혼교실’에서 서로간의 인기 경쟁과 견제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는 당대 최고의 인기 남자배우 신성일에 트로이카 배우, 엄앵란까지 합류해 장안의 화제였는데, 다른 영화를 찍다 늦게 촬영장에 합류한 문희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돌연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졌다고 한다. 한 컷도 찍지 못한 채 하루 일정을 통으로 날린 이 사건은 사실 문희의 꾀병이었다. 붉은 색 블라우스에 하얀 미니스커트로 꾸민 남정임, 검은 색으로 단정하게 차린 윤정희의 패션에 압도당한 문희는 스스로 준비한 의상이 초라하게 느껴진 나머지 즉석에서 연기를 벌였던 것이다. 서울 관객 10만을 동원한 ‘결혼교실’은 1세대 트로이카가 쏘아 올린 마지막 불꽃이었다. 훗날 문희는 은퇴를 결심할 당시를 회고하며 말했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영화를 찍었어요. 연이은 밤샘 촬영에 너무 지쳤습니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를 견인했던 트로이카 배우들의 공백은 이윽고 다가올 1970년대, 한국영화의 침체기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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