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 수립 기여자는 불가… 규정 개정 가능성에 보수층 “김일성도 줄 거냐”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 ‘암살’과 ‘밀정’ 등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의 독립유공자 지정 여부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독립운동과 북한정권 수립 기여 이력의 분리가 가능한지다.

국가보훈처 내부 규정인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 기준’에 따르면 김원봉은 서훈을 받을 수 없다. 보훈처는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1948년 8월 15일까지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사람들을 심사해 △적극적인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자 △독립운동 공적이 원전자료에서 확인된 자 △사망시까지 행적에 문제가 없는 자를 포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중 △대한제국 시기에 친일단체 활동 등으로 국위를 손상시키거나, 을사늑약 등 매국조약 당시 대신급 이상을 역임하여 국권상실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 자 △일제 식민통치 기구 또는 관련 단체에 재직하거나 식민통치에 직ㆍ간접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판단된 자 △상훈법 상의 서훈 취소 조항에 해당하는 자 등은 불가능하다. 상훈법은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지거나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등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

김원봉의 경우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확실하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 1944년 임정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1948년 월북해 북한 정권에서 잇달아 고위직을 지냈다. 북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48년 8월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고, 다음달 김일성 정권 초대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장관)을 지냈다. 1952년 3월에는 ‘미제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에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6ㆍ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취지로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노력 훈장까지 받았고, 두 달 뒤 노동상(장관)이 된 뒤 5년 후인 1957년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이듬해 김일성의 옌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

보훈처는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을 개정,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게 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김원봉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심사기준이 보훈처 내부 규정에 불과한 만큼 보훈처가 기준을 변경하면 김원봉은 서훈 대상에 포함되지만, 상훈법상 월북은 ‘적대지역 도피’에 해당해 서훈 취소 대상이다.

또 상훈법을 개정하면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건국훈장을 줄 수 있지만, 이렇게 되면 북한 초대 내각에서 부수상 겸 외무상을 지낸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이나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 주석까지 서훈대상에 포함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김원봉에게만 적용되는 예외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며 “내부 규정과 상훈법을 개정해 서훈을 추진할 순 있지만 다른 월북ㆍ친북 인사들과 구별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고 말했다. 보훈처가 보훈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을 3개 법률회사에 자문을 구했지만 3곳 다 제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도 판단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보훈처는 “현행 심사기준으로 포상은 어렵다”면서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만 내부 규정 및 상훈법 개정 등을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원봉 서훈 추진 비판은 색깔론”이라는 여당 측이나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이적행위를 한 사람에게 훈장을 줄 수는 없다”고 맞서는 야당 측 간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까진 김원봉 서훈은 요원해 보인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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