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정치권 공격에 시달리는 주요국 중앙은행들-박구원 기자/2019-04-15(한국일보)

중앙은행이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와 포퓰리즘 득세가 맞물리면서 선진국과 신흥국을 막론하고 정치권이 이른바 ‘돈을 찍어’ 경기를 부양하려는 심산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침해하는 상황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선 물가 인상 억제에 매몰된 중앙은행의 정책적 경직성이 외부 공격의 빌미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 공세에 흔들리는 ‘세계 중앙은행’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14일(현지시간)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WB) 총회에선 중앙은행의 독립성 위기가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특히 달러화를 관할하며 ‘세계 중앙은행’이라 불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노골적 금리 인하 압박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컸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 비슷한 입장을 지닌 스티븐 무어와 허먼 케인을 연준 이사 후보로 지명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미국 중앙은행이 독립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데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미국의 상황이 전세계 경제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거란 우려도 제기됐다. 토비아스 아드리안 IMF 통화자본시장국장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흔드는 것은 위험하다”며 “중앙은행에 대한 압력은 과도하게 느슨한 통화정책과 지속불가능한 재정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 독립성 침해에 대한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세다. 그는 13일에도 트위터로 “연준이 제대로 일했다면 주식시장은 더 올라가고 경제성장률도 4%대까지 올라갔을 것”이라며 “양적완화 축소(QT)의 정반대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의 경우 독립성 침해 압력이 가시화하진 않았지만 이사회를 구성하는 25명 가운데 드라기 총재를 비롯한 이사 3명과 회원국 중앙은행 총재 8명 등 총 11명이 올해 교체를 앞두고 있어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였다. 유로존 3위 경제국 이탈리아의 포퓰리즘 연정은 이미 자국 중앙은행을 의도적으로 흔들고 있다. 영국에선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따른 부정적 경제 전망을 내놓았다가 브렉시트 지지세력의 비판에 직면했다.

◇”경직된 정책으로 공격 자초” 지적도

중앙은행에 대한 정치적 공세는 신흥국도 매한가지다. 특히 터키와 인도에선 정치권이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 공공연하게 개입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리라화 안정을 추구하는 터키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시도에 경기 부양을 내세워 수시로 간섭하고 있다. 베라트 알바이라크 터키 재무장관과 무라트 체틴카야 터키중앙은행 총재는 12일 워싱턴에서 해외 투자자들을 상대로 비공개 간담회를 열었지만, 체틴카야 총재는 행사 내내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아 터키 내 중앙은행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인도에선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마찰을 빚던 우르지트 파텔 인도중앙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갑작스레 사임했다. 후임 샤크티칸타 다스 총재는 올해 들어 기준금리를 두 차례 인하하고 시중은행으로부터 달러를 매입해 루피화 공급을 늘리고 있다. 이를 두고 이달 7일부터 다음달까지 이어지는 총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모디 정부의 경기 부양책에 중앙은행이 공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앙은행의 정책적 실책이 독립성 훼손의 빌미를 줬다는 견해도 있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 목표에 매몰돼 경제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극도로 낮췄음에도 글로벌 경제는 인플레이션은커녕 경기 둔화를 걱정하고 있는 형국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물가 급등 가능성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저금리 정책을 고수한 탓에, 경기 둔화 상황에서 마땅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금리를 더욱 내리라는)외부 공격에 취약해졌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 결정 과정에 저물가를 얼마나 감안해야 할지를 두고 이견이 불거지는 상황 역시 통화정책 목표의 유효성을 둘러싼 세계적 논쟁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통화정책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2008년 금융위기의 산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조화, 중앙은행과 재정당국의 협조가 강조되다 보니 중앙은행의 정치적 중립성이 과거보다 약화한 것”이라며 “그러나 중앙은행의 정책이 대중영합적이거나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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